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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인[자유]불안한 현대사회 - 개인의 욕망과 도덕성은 조화될 수 있는가?
2026.09.30 01:34
저희 <충독>은 9월 모임에서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 를 읽고 여러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나눈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개인의 욕망과 도덕성은 양립할 수 있는가?
2. ‘윤리’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윤리’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 두 개의 핵심 질문으로부터 주제가 계속 뻗어나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저희가 나눈 대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찰스 테일러 『불안한 현대사회』 충독 모임 대화록
1. 개인의 욕망과 도덕성은 양립할 수 있는가
김진국: 그럼 예영 선생님부터 얘기 들어보고, 그다음에 도덕성의 정의에 대해서도 한번 얘기해 보죠. 지금 나온 질문은 개인의 욕망과 도덕성이 공존할 수 있느냐, 양립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이예영: 저는 개인의 욕망하고 도덕성은 양립할 수 있다고 보고, 오히려 어느 정도는 일치해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제가 윤리를 좋아하기도 하고요. 근데 테일러가 말하는 방식으로 그걸 실천하기는 조금 어렵지 않나 싶었어요.
이예영: 사람을 윤리적으로 만들 수 있느냐고 할 때 보통 인간의 본성을 두 방향으로 나누는 것 같아요. 하나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욕망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합리적으로 추구한다는 전제고, 다른 하나는 인간에게 본래 선한 본성이나 도덕적 직관이 있다는 전제예요.
이예영: 첫 번째 전제라면 “윤리를 따르면 결국 너한테도 이득이 된다”는 식으로 설득할 수 있고, 두 번째라면 “네 안에 원래 선한 마음이 있으니 그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라”라고 갈 수 있잖아요. 근데 제가 보기에는 테일러가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을 인정하면서 결론에서는 내면의 목소리와 진정성을 강조하는 느낌이라, 실천론으로서는 설득력이 조금 부족하지 않나 생각했어요.
김진국: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어요. 근데 제 이해로는 테일러가 겉으로는 두 번째처럼 말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첫 번째하고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책에서도 사익만 좇으면 오히려 그 사익 자체가 무너지고, 진정성의 이상을 제대로 따라가야 내가 정말 원하는 것도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잖아요. 이 사람 나름대로는 사익과 공익을 통일시키려는 것 같아요.
김진국: 물론 예영 선생님 말씀처럼 개인 안의 선한 본성이나 내면의 목소리에 어느 정도 기대는 측면도 있다고 봐요. 진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진우: 제가 앞 맥락을 다 들은 건 아니라서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질문 자체는 이런 거죠? 인간은 기본적으로 욕망을 가진 존재인데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사회에서 도덕성이 성립할 수 있느냐.
김진국: 네, 맞아요. 일단 질문은 그거예요.
이진우: 그러면 저는 스피노자가 떠올라요. 스피노자는 인간의 본성을 욕망으로 보잖아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존재가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 자기 존재를 유지하고 증대하는 방향으로 간다고 보는 건데, 그런 점에서 예영 씨 말씀에 상당히 공감해요.
이진우: 아무리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해도 자기 욕망을 혼자 힘으로 전부 실현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사회계약론도 나오고 사회와 국가, 공동체가 생기는 거잖아요. 결국 자기 욕망을 제대로 이루려면 도덕이나 윤리로 갈 수밖에 없다고 봐요.
이진우: 스피노자 식으로 보면 어떤 욕망이 당장은 나한테 좋다고 느껴져도 그게 부분적으로만 적합한 것일 수 있어요. 지금은 이익인데 나중에는 나를 망가뜨릴 수도 있죠. 그래서 부분적으로 좋은 상태에서 더 전체적으로 적합한 상태로 가려면 계속 따져봐야 하고, 저는 그 과정이 윤리라고 생각해요. 욕망과 도덕은 충분히 공존할 수 있고, 그걸 구축해 가는 게 이성의 역할이라는 거죠.
김진국: 저도 예영 선생님하고 진우 선생님 의견에 상당히 공감해요. 오히려 개인의 욕망은 전체 속에서만 제대로 실현된다고 봅니다. 개인의 욕망을 완전히 원자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오히려 자기파괴적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어요.
김진국: 저는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적으로 계급 얘기를 하고 싶어요. 우리가 “이건 내 개인의 욕망이야”라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 실제로는 노동자 계급 전체의 이익과 어긋나는 게 많다고 봐요. 단기적으로는 나나 우리 가족에게 이익일 수 있는데 거시적으로 보면 노동자 계급 전체를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욕망을 추구하는 거죠.
김진국: 마르크스가 노동자 계급을 보편적 계급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의미라고 생각해요. 노동자 계급이 자기 이익을 제대로 실현하면 결국 만인의 해방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은 그 계급에만 좋은 식으로 작동한다는 거죠.
김진국: 예를 들어 회사에 들어가면 옆 사람을 경쟁자로 느끼고, 조금이라도 스펙을 더 쌓아서 이기려고 하잖아요. 근데 모두가 끝없이 그러면 의미 없는 군비 경쟁이 돼요. 개인 차원에서는 당장 옆 사람을 이기는 게 중요해 보여도, 전체적으로는 노동자 계급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식으로 갈 수 있다는 거예요.
김진국: 상호님 여기 계셔서 이런 예를 들어도 되나 싶긴 한데, 사교육도 비슷하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 가족에게는 자녀를 위해 필요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회 전체에서는 모두를 끝없는 경쟁으로 밀어 넣는 비용이 될 수 있잖아요.
김민혜: 근데 결국 노동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이상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인간의 욕망이 자연스럽게 도덕성으로 귀결된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공존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싶어요.
김진국: 저는 거기서 “개인의 욕망”이 어디서 생겼는지를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가 개인의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사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욕망일 수 있다는 거죠. 경쟁해서 더 벌고, 옆 사람보다 더 잘나고 싶다는 욕망을 인간 개인의 본래 욕망이라고 바로 놓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임재현: 그러면 돈을 많이 벌고 싶다, 이런 것도 프롤레타리아의 본래 욕망은 아니라는 얘기네요.
김진국: 네. 적어도 제가 말하는 맥락에서는 그런 거죠.
2. 윤리란 무엇인가: 의도, 결과, 생존 전략
조상호: 저는 계속 얘기 들으면서 오히려 “윤리가 도대체 어디까지 윤리인가”가 먼저 정해져야 하는 것 같았어요. 저는 윤리라는 기준을 되게 빡빡하게 보는 편이거든요. 거의 칸트적인 윤리만 윤리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조상호: 그러니까 모두에게 이익이 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으면 그게 윤리인가, 아니면 유교에서 말하는 측은지심이나 칸트처럼 내 마음에서 우러나와 그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만 윤리인가 하는 거죠. 그보다 넓게 잡으면 그냥 생존 전략이나 집단을 유지하는 전략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김진국: 상호님 말씀대로라면 아까 나온 “이타심도 결국 이기심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문제랑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상호님은 칸트식으로, 내 의지의 격률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어야 하고 사람을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쪽에 가까운 거죠?
조상호: 네, 저는 대체로 그런 쪽이에요.
옥선미: 저도 그래서 궁금해요. 도덕성이라고 할 때 어디까지를 말하는 건지.
김민혜: 의도가 선하고 결과도 선해야 도덕적이라고 볼 건지, 아니면 의도는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좋은 결론이 나오면 그것도 도덕적이라고 볼 건지가 궁금해요.
김진국: 거기에 상호님이 제기한 것처럼, 의도와 결과를 떠나서 그게 생존 전략하고 어떻게 다른지도 문제고요. 일단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 것 같으니까 다른 의견도 들어보죠.
이진우: 윤리를 정의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렵고 시대적으로도 계속 바뀌어 왔다고 봐요. 절대적인 선과 악이 있고 거기에 얼마나 부합하느냐로 볼 수도 있고, 우리에게 좋은 것 혹은 어떤 집단과 구성원에게 좋은 것으로 볼 수도 있죠.
이진우: 저는 전공 영향도 있어서 고정된 선악의 대립으로 윤리를 보는 건 잘 안 맞는다고 생각해요. 어떤 절대적인 선과 악이 있어서 그걸 무조건 추구해야 한다기보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계속 판단하는 과정에 가깝다고 봅니다.
이진우: 그래서 어떤 행위가 한때는 윤리적이었어도 다른 시간, 장소, 구성에서는 윤리적이지 않을 수 있어요. 결과 하나만 보고 판단하기보다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를 판단하는 원리와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김민혜: 그러면 결국 시대마다, 상황마다 그 시대의 윤리가 필요하다고 보시는 거예요?
이진우: “이 시대에는 이 윤리가 있어야 한다”라고 딱 정한다기보다는, 그 시대와 상황을 종합해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향을 계속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게 결과적으로 그 시대의 윤리일 수는 있지만 불변하는 건 아니죠.
조상호: 예영 씨는 윤리교육과에서 윤리의 정의 같은 걸 따로 배우나요?
이예영: 네, 꽤 배워요. 저희는 어원부터 보는데, 윤리라는 말을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와 질서에 관한 것으로 설명해요. 서양 윤리든 동양 윤리든 결국 인간이 같이 사는 문제를 다룬다는 식으로요. 다만 의도를 꼭 넣어야 하는지, 결과를 얼마나 봐야 하는지는 입장마다 굉장히 달라요.
이예영: 저는 개인적으로는 의도가 완벽하게 선하지 않아도 결과가 선하다면 어느 정도 윤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을 판단할 때 조금 더 관용적으로 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이진우: 예를 들면 어떤 사례를 생각하고 계세요? 의도는 선하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선한 경우요.
이예영: 제가 배운 예시는 오히려 반대 경우에 가까운데요. 어떤 엄마가 불타는 집에서 아이를 정말 필사적으로 구하려고 했는데 결국 아이가 죽었다든가, 손님에게 호의로 차를 대접했는데 우연히 독이 들어 있어서 사람이 죽었다든가 하는 경우예요. 의도는 선한데 결과는 나쁜 거죠. 반대로 생각하면 의도와 결과가 반드시 같이 가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김민혜: 제가 생각한 반대 사례는 그냥 누군가를 죽였는데 알고 보니 굉장한 범죄자였던 경우예요. 나는 선한 의도로 한 게 아닌데 결과적으로 사회에는 좋은 일이 된 상황 같은 거요.
이진우: 그건 『살인자ㅇ난감』 같은 설정이네요.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이라, 결과가 좋게 보였다고 해서 적합한 행위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조상호: 예영 씨는 그런 경우까지도 윤리적이라고 보시는 거예요?
이예영: 엄밀한 이론이라기보다는 사람을 볼 때 조금 관용적으로 보고 싶다는 쪽에 가까워요. “네 의도가 완전히 선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잘 됐으면 됐다”라고 볼 여지도 있지 않나 하는 거죠.
조상호: 저는 윤리라는 단어 자체를 그렇게 어원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좀 새롭네요. “더불어 사는 법칙” 정도로 이해하면 제가 생각하던 딱딱한 도덕보다 문턱이 많이 낮아지는 느낌이에요. 그 정도라면 생존 전략 같은 것도 윤리의 범위에 들어올 수 있겠네요.
김민혜: 저도 지금 얘기 들으니까 “윤리가 원래 이런 뜻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와요. 저도 칸트적인 윤리가 아니면 윤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그렇게 보면 칸트의 윤리는 윤리 전체라기보다 하나의 강한 신념 체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예영: 도덕하고 윤리를 우리나라에서는 구분해서 쓰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 엄밀하게 항상 나누는 것 같지는 않아요. 교육과정에서는 구분할 수 있어도 일상에서는 많이 섞여 쓰이죠.
3. 윤리의 범위는 인간까지인가, 자연 전체까지인가
임재현: 지금 얘기를 들어보니까 윤리는 “나 혼자 좋은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좋은 걸 찾는 문제처럼 들려요. 그러면 결국 “모두가 좋은 게 뭔데?”에서 토론이 생기는 것 같고요.
임재현: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모두가 나랑 똑같은 사람이라면 판단이 쉬워요. 다 내 클론이면 나한테 좋은 게 모두에게 좋은 거잖아요.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으니까, 저는 서로 비슷한 경험을 갖는 게 개인의 도덕을 공동의 윤리에 가깝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임재현: 예를 들어 재벌이 반지하에 사는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알기는 어렵잖아요. “돈 없으면 일하면 되지”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 상황에 놓이면 아파서 일도 못 하는 등 여러 조건이 있을 수 있어요. 직접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않으면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거죠.
임재현: 그래서 많은 사람이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저는 우리나라에서 그런 사례 중 하나가 군대라고 생각해요. 좋고 나쁨을 떠나서 많은 사람이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니까 일정한 공통 감각이 생길 수 있다는 거죠.
김진국: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선미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옥선미: 저는 우선 윤리의 대상이 어디까지인지가 궁금해요. 인간 종에 한정하면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이라는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인간을 넘어 전체 자연으로 넓히면 모두에게 좋은 상태가 가능한가 싶거든요.
이진우: 윤리의 대상을 동물이나 사물로 확장하는 입장도 있긴 하죠.
옥선미: 맞아요. 근데 그렇게 끝없이 넓히면 우선순위를 세울 기준 자체가 사라질 것 같아요. 저는 일단 인간이라는 종 안에서 “너도 좋고 나도 좋고 같이 살기 좋은 상태” 정도를 기준으로 보는 게 현실적이지 않나 싶어요.
김진국: 선미님이 좋은 포인트를 짚으신 것 같은데, 저는 오히려 거기서 결론이 반대예요. 인간이 모두 동의한다고 해서 그게 윤리가 되는 건 아니라고 봐요. 우리 인간이 전부 동의해서 자연을 계속 파괴하고, 결국 지구와 인류 자체를 망가뜨린다면 모두가 동의했어도 틀린 거잖아요.
김진국: 그래서 윤리를 인간의 동의나 주관적 만족의 차원에서만 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인간을 넘어서 자연 전체를 놓고 봐야 하고, 인간도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특수한 자연이라고 보는 쪽입니다.
김진국: 그렇게 보면 인간을 포함한 자연 전체가 계속 번성할 수 있는 방향이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우리가 서로 합의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자연 전체의 조건까지 같이 봐야 한다는 겁니다.
김진국: 제가 안드레아스 말름 얘기를 했던 것도 그 맥락이에요. 자연이 실제로 파괴되고 있는데 사물의 의미나 주관적인 만족만 얘기해서는 부족하다는 거죠. 자본주의가 생태계 전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까지 볼 수 있는, 좀 더 과학적인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김진국: 칸트주의에 제가 약간 반감을 갖는 이유도 이런 위험 때문이에요. 제가 떠올린 사례 중에는 나치 가해자들이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자신들을 교양 있고 도덕적인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문제가 있어요. “이런 사람이 보편적 인간이다”라는 규정을 너무 강하게 세우면 그 규정 밖의 사람을 비인간으로 밀어낼 위험도 있다고 봅니다.
김민혜: 그렇게 보면 오히려 윤리를 규정하는 것 자체에서 배제나 폭력이 생길 수도 있다는 얘기인가요?
김진국: 그 위험은 크죠. 그렇다고 규정을 안 할 수는 없어요. 무엇이 전체를 살리는 방향인지 판단하려면 결국 윤리에 대한 규정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4. 개인주의, 진정성, 그리고 “보편적 진리”를 원하는 마음
이승용: 저는 이 주제를 고민하다가 테일러가 왜 현대사회가 개인주의로 간다고 했는지 조금 체감했어요. 생각을 끝까지 따라가다 보니까 저도 어느 순간 개인주의자가 돼 있더라고요.
이승용: 윤리를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사회 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행동” 같은 식으로 나오는데, 그럼 그 마땅함을 누가 정하느냐는 문제가 생겨요. 내가 진짜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게 내 본래 자아에서 나온 건지, 아니면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업 얻고 돈 벌어야 한다”는 식으로 사회가 만들어준 가치관을 내 의지라고 착각하는 건지 어떻게 구분하냐는 거죠.
이승용: 그걸 계속 파고들면 너무 힘들어요. 그러다 보면 그냥 “내가 선택했으니까 이건 내 선택이야”라고 편하게 생각하고 싶어져요. 테일러가 비판한 개인주의도 이런 데서 나오는 것 같아요. 진정한 자아를 찾는 과정이 너무 어렵다 보니까,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를 정당화 근거로 삼아버리는 거죠.
이승용: 그래서 요즘에는 차라리 보편적인 진리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저처럼 철학이나 윤리에 계속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기 어려운 사람은 그냥 “이게 보편적으로 맞는 윤리다”라고 누가 확실하게 정해주면 주입받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거죠. 근데 또 그렇게 되면 그게 진짜 윤리인가 싶고요.
조상호: 그게 책 초반에 나오는 문제하고도 이어지는 것 같아요. 결국 독재를 원하게 되는 쪽으로 갈 수도 있으니까요.
이승용: 맞아요. 생각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내가 주체가 되기를 포기하고, 그냥 누가 정해준 걸 따르고 싶어지는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그것도 되게 불안했어요.
이진우: 사람들이 영웅주의를 원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수 있겠네요. 나 대신 판단하고 이끌어줄 사람을 원하는 거죠.
임재현: 나는 생각 안 해도 되고, 그냥 따라갈 레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같은 거죠.
김진국: 그 마음은 이해해요. 근데 저는 거기에는 동의가 잘 안 돼요. 내가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우연히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그걸 윤리라고 할 수 있느냐는 문제랑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김진국: 헤겔 같은 철학자는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을 구분하잖아요.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생각해 보면 자연을 더 많이 이해하고, 그 법칙을 내 것으로 만들수록 자유로워진다고 봐요. 옛날에는 비가 오기만 기도했지만 과학이 발전하면 날씨를 예측하고 비료를 만들면서 자연에 끌려가기만 하지 않게 되죠.
김진국: 도덕도 비슷하다고 봐요. 도덕이 그냥 밖에서 떨어지는 명령이면 아직 거기에 묶여 있는 상태고, 그 이유를 이해해서 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진짜 자유가 된다는 거예요.
김진국: 칸트하고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요. “내가 세운 보편적 법칙에 내가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 어떻게 자유냐”는 질문에, 오히려 내가 스스로 세운 법칙에 스스로 묶이는 것이 자유라고 답하는 식이죠. 승용님이 보편적인 윤리를 주입받고 싶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결국 그걸 자기 것으로 이해해야 진짜 자유라고 봐요.
이승용: 저도 그래서 의도와 결과 얘기할 때 최종적으로는 의도가 있어야 한다는 쪽으로 갔어요. 결과가 좋았다는 것만으로는 우연일 수 있잖아요. 의도가 함께 있어야 같은 좋은 결과를 다시 만들 수 있고, 재현 가능성이 생기니까 그때 더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싶었어요.
김진국: 그 부분은 저도 동의해요.
임재현: 근데 아까 과학을 통해 자연에 덜 묶이게 되면서 자유로워졌다고 한 게, 테일러가 말하는 탈주술화 과정하고 비슷한 거 아닌가요?
김진국: 맞아요. 탈주술화에는 분명 해방적인 면이 있어요. 중세에는 “너는 천민으로 태어났으니까 평생 천민이야”라고 할 수 있었는데, 탈주술화가 진행되면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인데 그 신분이 왜 절대적이냐”고 할 수 있잖아요. 다만 그렇게 해방되는 만큼 불안도 같이 올라오는 거죠.
임재현: 해방의 반대편에 불안이라는 부작용도 같이 생긴다는 거네요.
김진국: 그렇죠.
5. 윤리를 개인의 성찰에 맡길 것인가, 시스템으로 만들 것인가
김민혜: 그러면 도덕과 윤리도 어떤 강제적인 장치나 시스템을 통해서 좋은 결과가 계속 나오게 만들 수 있지 않나요? 저는 개인주의자이기도 하고 도구적 이성을 좋아하는 편인데, 동시에 인간의 욕망이 저절로 도덕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김민혜: 그래서 저는 정치든 경제 구조든, 어느 정도 인간을 강제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봐요. 테일러처럼 개인이 자아를 성찰하고 연대하면 된다고 말하는 건 현실적으로 점프가 너무 커 보여요.
김민혜: 이미 불안하고 우울한 사람에게 갑자기 “독서모임 하고 공동체를 만들면서 성찰해 봐”라고 했을 때 거기로 넘어갈 힘이 어디서 생기느냐는 거죠. 테일러는 그 중간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저는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동의한다기보다, 구조를 바꾸는 도구로서 시스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임재현: 가이드가 필요하다는 거네요.
김민혜: 맞아요. 어느 정도는 강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거죠. 예를 들어 아동학대를 줄이려면 “부모가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자”가 아니라 부모 교육을 하고, 국가가 관리하고, 제도를 만드는 게 실제로 피해를 줄일 수 있잖아요. 저는 그런 것도 결국 선을 만드는 방식이라고 봐요.
김진국: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는데 저는 거기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해요. 그렇게 되면 내가 왜 지켜야 하는지를 모른 채 강제로 따르게 되잖아요. 그건 외재적인 규칙일 수는 있어도 제가 생각하는 윤리하고는 다른 차원이에요.
김민혜: 저는 “이 사회에서 계속 살고 싶으면 이 규칙은 지켜” 정도라도 먼저 작동하면 된다고 보는 쪽이에요.
김진국: 그건 사회의 무질서를 줄이고 비용을 줄이는 경제적·행정적 시스템이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굳이 윤리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고 봐요.
김민혜: 맞아요. 제가 말하는 건 그 시스템이 먼저 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행동하다 보면 나중에는 우리가 말하는 윤리적 태도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느냐는 거예요.
이진우: 시스템이 있으면 그런 효과가 생길 수는 있겠죠. 다만 그 시스템 자체가 절대적으로 옳은지는 또 별개의 문제예요. 결국 그것도 사람들이 만들고 운영하니까요.
김민혜: 맞아요. 누가 결정하고 만들고 집행할 거냐는 문제가 다시 생기죠.
이진우: 그래서 저는 결국 정치가 계속 필요하다고 봐요. 어떤 시스템 하나를 만들어서 끝내는 게 아니라, 집단과 집단, 개인과 개인, 국가와 국가가 계속 부딪히고 싸우면서 서로에게 더 좋은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이요. 보편 윤리가 있다면 그런 정치적 과정에서 조금씩 만들어지는 산물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이진우: 스피노자 식으로는 우리 역량을 증가시키는 것이 좋은 것이고, 역량을 감소시키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문제는 사람들이 너무 다르다는 거죠. 그래서 “어떤 한에서 우리가 일치하는가”가 중요해요. 예를 들어 기업의 횡포에 맞서 노동자들이 노조로 뭉치는 그 한에서는 서로의 역량을 키우는 공동의 행동이 될 수 있겠죠.
이승용: 저는 시스템이 개인에게 강제성을 부여하는 순간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봐요. 시스템을 장악하는 것도 결국 사람이고, 미성숙한 개인을 성숙하게 만들겠다고 만든 장치가 소수에게 장악되면 오히려 착취 플랫폼이 될 수도 있잖아요. 자본주의도 그런 식으로 볼 수 있고요.
이승용: 개인이 스스로 “윤리적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게 제일 좋지만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죠. 그래서 결국 정치가 필요하고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좋은 시스템도 언제든 변질될 수 있다는 게 숙제인 것 같아요.
김민혜: 저도 바로 그 지점이 숙제라고 봐요. 그래도 테일러처럼 개인에게 성찰과 연대를 요구하는 것만으로 풀 문제는 아니고, 정치와 행정, 교육 같은 구조를 함께 바꿔야 한다는 쪽이에요.
김진국: 저는 거기서 또 하나 반론하고 싶은 게, 국가 차원의 시스템도 결국 국가의 이익이나 특정 계급의 이익에 봉사할 수 있다는 거예요.
김민혜: 국가도 결국 정치적으로 구성되고 누군가가 행정력을 행사하는 거니까요.
김진국: 마르크스는 현대 국가를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를 유지하는 기구로 보잖아요. 그래서 제 기준에서는 국가가 법을 만든다고 해서 그 자체가 윤리가 되지는 않아요. 특정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제도일 수도 있으니까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그걸 곧바로 국가 시스템과 동일시하면 안 된다고 봐요.
6. 노동자 계급은 정말 보편적 계급인가
이진우: 제가 진국 선생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의문이 드는 게 있어요. 항상 노동자와 부르주아처럼 적대하는 집단이 등장하잖아요. 그런데 노동자도 결국 하나의 집단이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 아닌가요?
이진우: 노동자의 세상이 오면 모두가 평등하고 윤리적인 사회가 되고, 별도의 강제력 없이도 잘 굴러간다는 그림은 저한테는 너무 유토피아적으로 느껴져요. 결국 인간 본성을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김민혜: 저도 그게 궁금했어요. 실제로 노조를 만들면 노조도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이잖아요. 이미 처우가 좋은 대기업 노조도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하고 파업할 수 있고요.
이진우: 노동자를 자동으로 더 선한 집단으로 놓는다면 전형적인 언더도그마가 될 위험도 있지 않나 싶어요.
김진국: 여기서 제가 말하는 노동자 계급을 좀 정확히 해야 할 것 같아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할 때의 노동자 계급은 특정 회사 노조를 말하는 게 아니라 세계 전체의 노동자 계급을 뜻합니다.
김진국: 그리고 진우 선생님 지적대로 노동자도 자기 계급의 이익을 추구하는 특수한 집단이 맞아요. 그런데 마르크스가 그 계급을 긍정하는 이유는,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은 그 계급에만 좋은 반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은 인류 전체의 해방으로 이어진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김진국: 왜냐하면 세상의 대부분을 실제로 만들어내는 힘이 노동에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뭐냐고 물으면 저는 노동이라고 답할 거예요. 노동은 바깥의 자연을 개조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자연의 법칙을 파악해서 인간의 세계로 바꾸는 활동이에요.
김진국: 그래서 인간을 “특수한 자연”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자연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바꾸는 활동이 인간의 노동으로 나타나는 거죠.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이 인류 전체의 해방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런 인간관이 깔려 있어요.
이승용: 좀 도발적인 질문일 수도 있는데, 인간의 본성이 노동이라면 자본가는 노동을 안 하는 건가요?
김진국: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노동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으로 나눌 수 있어요. 자본가나 관리자는 정신노동을 담당하고 노동자는 육체노동을 담당하는 식으로 분리가 되는데, 바로 그 분리가 비극이라고 보는 거죠.
김진국: 노동이라는 게 원래 자연을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인데, 정신노동이 따로 떨어져 있으니까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은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전체에서 내 일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어려워져요. 그래서 노동이 자기실현이 아니라 형벌처럼 느껴지는 거고요.
이진우: 제가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해 볼게요. 인간의 본성이 노동이고, 그 노동 안에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있는데 자본주의에서는 둘이 분리돼 있고 자본가 쪽이 정신노동을 독점하면서 육체노동자를 지배하는 형태가 비극이라는 거죠?
김진국: 네, 큰 틀에서는 그렇습니다.
이진우: 근데 그 분화 자체도 인간 역사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현상이라면, 그걸 극복하려면 결국 지금의 인간 본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어떻게 평등한 상태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지가 잘 상상이 안 돼요.
조상호: 저도 진우 선생님 질문에 하나 더 얹고 싶어요. 지금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가 나뉘어 있고, 프롤레타리아가 혁명해서 모두 평등한 상태가 됐다고 쳐요. 그런데 인간이 원래 다시 서열과 계급을 만드는 존재라면 거기서 또 새로운 계급이 생기는 것 아닌가요?
조상호: 예를 들어 『솔로지옥』처럼 비슷한 조건의 사람들을 모아놔도 그 안에서 다시 인기와 서열이 나뉘고, 침팬지 같은 동물 집단에서도 위계가 생기잖아요. 이런 걸 인간의 본성이라고 전제하면 평등해진 뒤에도 계급이 되풀이될 것 같다는 게 질문이에요.
김진국: 저는 바로 그 전제에서부터 생각이 달라요. 인간의 본성이 개인의 이기심이나 서열 욕망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적 관념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인류학적으로 인간은 혼자 노동하지 않았고, 기본적으로 협력해서 노동해 왔어요. 마르크스 용어로는 결합노동이죠.
김진국: 마르크스가 원시공산사회에서 출발하는 것도 그래서예요. 인류의 최초 단계가 무계급적인 공동체였다는 거죠. 지금 자본주의에서 경쟁과 계급이 너무 당연해 보이니까 그걸 인간 본성으로 착각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7. 인간 본성, 사적 소유, 화폐와 계급의 발생
김진국: 다만 한 가지는 구분해야 해요.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인간 본성에서 벗어난 잘못된 길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인류가 자기 역사 속에서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에 도달했다고 보고, 공산주의로 가려면 자본주의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봅니다.
김진국: 그러니까 자본주의는 어른이 되기 전에 거치는 청소년기 같은 거예요. “이 단계를 초월해 버리자”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거쳐가는 단계라는 거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조건을 자본주의 자체가 만들어낸다고 보는 겁니다.
김진국: 그리고 마르크스가 미래 공산주의 사회의 모습을 아주 상세하게 설계했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오해예요. 제가 중요하게 보는 건 사적 소유의 철폐 정도고, 미래 사회가 정확히 이렇게 생길 거라고 구체적으로 그린 사람은 아니라고 봐요. 핵심은 자본주의의 생성과 운동, 그리고 종말의 조건을 분석했다는 데 있습니다.
김민혜: 그러면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구체적인 모습이 아니라, 어떤 방식인지는 몰라도 배타적인 사적 소유는 결국 철폐될 거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 거죠?
김민혜: 근데 진우 선생님하고 상호님 질문은 이런 것 같아요. 원시사회에서는 계급이 없었다고 해도 결국 역사 속에서 잉여와 사적 소유, 계급이 생겼잖아요. 그렇다면 그게 오히려 인간의 본성 아니냐, 나중에 사적 소유가 사라져도 다시 계급이 생기지 않겠느냐는 거죠.
김진국: 마르크스가 말하는 사적 소유의 철폐는 개인이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개인적 소유는 남습니다. 사적 소유는 배타적이고 원자적인 소유, 즉 “이건 오직 내 힘으로 만든 내 것”이라고 보는 방식에 가까워요.
김진국: 현대사회에서 내가 가진 물건 하나도 사실 수많은 사람의 노동을 거쳐서 온 거잖아요. 내가 열심히 일해서 얻은 것을 내가 쓸 수는 있지만, 그것이 오로지 나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어졌다는 식의 소유관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거죠. 사회적으로 생산한 만큼 일정 부분이 공동으로 돌아가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김민혜: 그러니까 생산 자체가 사회적이라는 사실을 반영하는 소유 형태가 생기고, 배타적인 사적 소유는 점차 없어질 거라는 말씀이네요.
이진우: 제가 이해한 걸 한번 확인해 볼게요. 원래 인간은 협력적으로 살아왔는데 자연의 한계나 생산력의 한계 때문에 계급과 불평등이 생겼고, 기술과 과학이 발전하면 다시 더 평등한 형태로 갈 수 있다는 설명인가요?
김진국: 그 부분은 조금 다르게 설명해야 해요. 단순히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계급이 생겼다는 건 아니고, 생산력 발전의 논리적인 귀결로 계급 분화가 생긴다고 보는 쪽이에요.
조상호: 저도 여기서 하나 더 물어볼게요. 원시사회가 협력적이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게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있어요. 사람도 누구나 아기였지만, 그렇다고 성인이 된 사람한테 “너의 진짜 본질은 아기니까 아기 때로 돌아가야 해”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조상호: 그러니까 인류의 첫 모습이 협력적이었다는 것과 “협력이 인간의 본성이다”라는 결론 사이에는 뭔가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역사 속에서 경쟁과 계급이 생겨난 것도 인간의 한 모습일 수 있으니까요.
김진국: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근데 마르크스주의에서 인간의 본성을 “원시사회 때 그랬으니까 협력적이다”라고만 말하는 건 아니에요. 제가 앞에서 인간의 본성이 노동이라고 했잖아요. 그 노동은 자본주의에서도 사라지지 않았어요. 지금도 인간 사회 전체를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힘입니다.
김진국: 하루만 모든 노동이 멈춘다고 생각해 보면 바로 드러나죠. 우리는 눈에 안 보일 뿐 세계 전체에서 서로 연결돼 협력하면서 노동하고 있어요. 이 협력성과 노동의 사회성이 지금도 존재하기 때문에 그걸 인간의 본성이라고 보는 거예요.
김진국: 그리고 계급 분화가 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하려면 화폐까지 가야 해요. 생산력이 발전할수록 직업이 세분되고 사람들의 노동이 점점 서로 연결됩니다. 옛날에는 각자 자기 물건을 만들어 쓸 수 있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기계를 만드는 사람, 돌리는 사람, 수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죠.
김진국: 이렇게 노동이 사회화되면 서로 다른 노동을 비교하고 교환할 공통의 매개가 필요해지고, 그 역할을 화폐가 합니다. 물건을 서로 교환하기 위해 쓰는 화폐가 생기면 그다음에는 화폐 자체를 불리려는 사용도 나와요.
김진국: 자본가는 화폐를 단순히 물건 사는 데 쓰는 게 아니라 투자해서 더 많은 화폐를 얻으려고 하죠. 공장을 세우고 상품을 팔아 번 돈을 다시 투자하고, 그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러다 보면 생산수단을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하고,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나뉘게 돼요.
김진국: 제가 계급 분화를 필연이라고 말하는 건 “사람이 원래 이기적이어서”라는 심리적 설명이 아니라, 생산력과 분업, 화폐, 자본의 운동을 따라가면 그런 구조가 생긴다는 논리적 설명에 가까워요.
김민혜: 이 부분은 다음에 시간을 좀 더 두고 다시 물어보면 좋겠네요.
김진국: 네, 오늘은 시간이 다 돼서 여기까지만 하죠.
- 활동 일시: 2026년 9월 20일(일요일) 18:00 ~ 21:00
- 활동 장소: 충북대학교 N2동 회의실
- 참석자 이름: 김진국, 조상호, 이진우, 이승용, 옥선미, 임재현, 이예영, 김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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