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눈 핵심 질문
Q1. 돈키호테의 행동은 광기에 사로잡힌 노인의 추태인가? 혹은 기사도가 사라져가는 시기에 기사소설을 동기로 정의를 추구하려는 사람의 몸부림인가?
Q2. 돈키호테의 기사도 추구와 무협에서의 협 추구가 비슷하다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 무협에서는 정파의 무인들이 강호에 나와 사파를 무찌르고 양민을 구휼하는 등의 협을 행하는 강호행을 떠나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무협에서의 강호행과 돈키호테의 모험은 비슷한 결의 이야기로 보아도 괜찮은가?
“편력 기사들의 일은 괴로워하는 자나 사슬에 묶여 있는 자나 억압받는 자들이 그런 모습으로 길을 가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그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된 이유가 그들의 잘못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짓들 때문인지 알아보는 데 있는게 아니다. 그들의 고약한 행위를 보는 게 아니라 그들의 고통에 눈을 돌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기사의 임무란 말이다”(466P, 30장 아름다운 도로테아의 신중함과 정말 재미있는 일들에 대하여)
Q3. 대만에서 흉기난동을 제압한 사람이 ‘용사 힘멜이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라며 인터뷰한 내용이 소소하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는 만화 <장송의 프리렌>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한 것으로, 해당 만화에서는 힘멜과 함께한 동료들이 힘멜의 사후, 평소의 본인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위이지만 힘멜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동기를 부여받듯 특정 상황에서 행동하고 이런 말을 하고는 한다.
어떤 경우에는 창작물임을 우리가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비록 돈키호테는 기사소설을 창작물이 아닌 실제 이야기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위와 같은 경우는 돈키호테와 비슷한 부류의 경우로 보아도 괜찮은가? 우리가 마주하는 창작물이 우리의 일상, 혹은 세계를 구성하는 것에 있어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가?
주요 내용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통해 인간의 인식 또는 믿음이 개인의 세계 형성에 주는 영향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논의주제 1: 돈키호테의 행동은 광기에 사로잡힌 노인의 추태인가? 혹은 기사도가 사라져가는 시기에 기사소설을 동기로 정의를 추구하려는 사람의 몸부림인가? 돈키호테라는 인물에 대한 생각을 공유해 보자.
- 이수영: 노인공경을 하려고 했는데 노인공격을 하게 되었다. (농담)
- 김하연: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노인공격을 하게 되었다. (농담)
- 정예은: ‘기사도’라는 일종의 ‘협’인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 실행력은 대단한 것 같다.
- 이정현: 고전의 가치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다.
- 구태희: 과연 돈키호테 데 라만차를 기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 어딘가에 미쳐 살아가고 있다. 돈키호테가 안타까우면서도 실행력 있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예은: 인식주체에게 명석판명할 정도로 강한 믿음이라면 이 믿음은 충분히 참이 될 수 있는가? 이런 인식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이 전통적인 지식의 정의인데, 여기서는 지식 이전에 인식에 대한 문제부터 다루어야 한다. 『돈키호테』라는 작품을 다룰 때 개인의 믿음과 실제 진리와의 일치 여부 간 괴리를 조명하는 입장 또한 많고, 철학적인 입장에서는 인식의 문제에 더 집중해서 논의할수도 있겠으나, 우리는 한 개인이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해 보려 한다.
논의주제 2: 돈키호테의 기사도 추구와 무협에서의 협 추구가 비슷하다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 무협에서는 무인들이 강호에 나와 사파를 무찌르고 양민을 구휼하는 등의 협을 행하는 강호행을 떠나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무협에서의 강호행과 돈키호테의 모험은 비슷한 결의 이야기로 보아도 괜찮은가?
법과 협이 충돌하더라도 협을 수행하는 것이 무협에서의 협인데, 돈키호테는 편력기사의 생활을 관무불가침으로 환원하기 때문에 여러 문제 상황이 발발한다. 협과 돈키호테의 기사도를 대조해 보자.
- 김하연: 무협은 가상이기 때문에 돈키호테와 가장 큰 차이가 있지만, 믿음과 협의 측면에서 유사하다 할 수 있다.
- 이수영: 협은 실정법과 자연법의 충돌에서 실정법을 어기더라도 정의를 따르는 것인데, 돈키호테는 실정법과 자연법 둘 다 어긴다는 점에서 협과 차이를 보인다. 또한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편력기사의 생활을 수행하기 위해 기사들이 거치는 일종의 절차들을 따르려 하는데, 그 절차를 ‘유도리 있게’ 상황에 맞춰 재해석하는 정도가 개인이 가진 인지왜곡과,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정도와 맞물려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사회의 정의를 지킨다는, 즉 기사도-무협에서는 협-를 수행하기 위해 제도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 간의 도리라는 암묵적인 규칙들도 함께 무시한다. 그러면서도 사회가 본인을 존중하고, 나아가 대접해 주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할 수 있다. 조금 덧붙이자면 고향에 돌아오고 나서야 작품 내에서 처음으로 돈키호테 데 라만차의 실명이 거론되며 돈키호테가 되기 전의 개인이 가지고 있던 성품과 지혜를 알아보는 인물이 등장하고, 주위 사람들의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는다는 점에서 귀향 모티프를 떠올리며 읽었다.
- 구태희: 책들이 태워지는 장면이 슬펐다.
- 정예은: 그 장면이 우리의 일상에 비유하자면, 본가에 소중한 귀중품을 전시했다가 돌아갔을 때 부모님이 “나이 먹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라고 하면서 불태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원래 기사 서임에 있어 광인은 배제되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결국 모든 일의 시작은 여관에서 여관 주인이 함부로 기사 서품을 내려주는 것에서 시작했다.(농담)
- 김하연: 왜 돈키호테가 이상이고 산초 판사가 현실이지?
- 정예은: (본문에 기반한 설명을 해줌)
- 구태희: 산초 판사의 돈키호테 데 라만차를 향한 촌철살인을 그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 정예은: 2권의 결말을 고려했을 때, 우울증을 가진 사람이 활력을 얻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생각해 보자면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이 느껴진다.
- 김하연: 이 사람에게는 이것이 실존이구나.
- 이정현: 무협소설의 사고실험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까? (개념 상의 문제로 기각)
- 정예은: “역트루먼쇼”
- 이정현: 돈키호테의 동력을 용기로 볼 것인가, 광기로부터 비롯된 강력한 믿음으로 볼 것인가
- 구태희: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의 돈키호테 편에 등장하는 돈키호테 해석은 현실에 자신의 텍스트가 없어 자신이 텍스트가 되기로 했다는 시각이다. 트루먼쇼에서도 트루먼의 이상행동을 주변인들이 제지를 하는데, 다들 투쟁을 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자신만의 세계가 이미 구성된 세계에 지지 않도록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돈키호테, 힘내! ”
이정현: 불평불만만 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실제로 실행에 옮긴 것에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혹은 주변에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 있다면 사실을 일깨워줄 것인가?
- (여러 대화를 나누었음..)
김하연: 읽으면서 가장 수치심을 느꼈던 장면이 있는가?
- 이수영: 돈키호테 데 라만차가 목동들에게 키질당하는 산초 판사를 구하려 하지만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묘사되는 장면.
- 정예은: 죄수들을 풀어주고 나서 죄수들에게 구타를 당했을 때.
- 김하연: “이건 자연재해다.”
- 정예은: 그 사건을 문제삼아 종교경찰들이 처벌하러 오면서 막장으로 전환되는 시점이 있다. 아무래도 죄수들을 풀어주었던 사건이 내용상으로도 중요했기에 그만큼 각인이 컸다.
- 이수영: 사르트르의 시선 투쟁과 인식 주체의 세계 구성 방식을 적용하면 돈키호테의 경우에는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면서 타인을 대상화하는 정도가 매우 강하고 실질적인 민폐와 해악을 끼치기 때문에 거부감에서 비롯한 질타를 받곤 한다. 자기중심적 면모가 강하다는 것인데, 돈키호테를 비판할 때 사실은 우리들도 자기중심적인 면모가 있기 때문에 자기중심성을 비판할 때 이런 지점들도 고려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 구태희: 최고봉은 둘시네아. 편력기사로 떠나는 모험의 전제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수하고 모험을 떠나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김하연: 인물들의 구성이 무협소설과 유사하여 돈키호테만 없으면 무협소설과 비슷한 방향으로 갈 것 같다.
논의주제 3: 대만에서 흉기난동을 제압한 사람이 ‘용사 힘멜이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라며 인터뷰한 내용이 소소하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는 만화 <장송의 프리렌>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한 것으로, 해당 만화에서는 힘멜과 함께한 동료들이 힘멜의 사후, 평소의 본인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위이지만 힘멜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동기를 부여받듯 특정 상황에서 행동하고 이런 말을 하고는 한다.
우리는 창작물임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동기를 부여받기도 한다. 비록 돈키호테는 기사소설을 창작물이 아닌 실제 이야기로 받아들이나, 위와 같은 경우를 돈키호테와 비슷한 부류의 경우로 보아도 괜찮은가? 우리가 마주하는 창작물이 우리의 일상, 혹은 세계를 구성하는 것에 있어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가?
정예은: 창작물임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강력한 동기를 부여받기도 한다. 물론 돈키호테의 경우에는 기사소설의 내용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며 가상일 경우 국가에서 출판을 거부당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창작물이라는 가상이 현실세계와 개인의 인식 구성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에 대해 충분히 다뤄볼 만한 계기가 된다.
- 이정현: 나도 내가 만들어 낸 세계에 살고, 창작물이 나의 일상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개인적인 사례로는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일주일간 우울감을 느끼는 등의 사례가 있었다. 독문학에서 비유를 하자면 베르테르 신드롬처럼 죽음이라는 진중한 문제까지도 심지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만큼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읽는 책에 따라 그때그때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허상에 빠져 살곤 한다.
- 김하연: 개인적으로 나의 일상을 바꿀 정도까지 영향을 받는 경우는 잘 없다. 대만 흉기난동 제압의 경우(“힘멜이라면 그랬을 테니까”)는 돈키호테 희망편이다.
- 구태희: 이입을 하면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입을 하지 않고 거리를 둘 경우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 편이다. 최근 <쿵푸팬더>를 즐겨 보고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데, 나의 추구와 일치할 경우에는 많은 영향을 받는 것 같다.
- 이수영: 동기를 부여받기보다는 내 관점을 토영해서 해석하여 의미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창작물과 관계맺는 경향이 있다. <노르웨이의 숲> 이야기가 나와서 이 작품으로 이야기하자면, <노르웨이의 숲>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등장인물들의 연이은 죽음 및 상실과 방탕한 성생활의 묘사가 아니라 나는 너(사망한 연인)를 떠올리며 오늘도 태엽을 감는다고 혼자 말을 건네는 장면이었다. 떠난 연인에 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모습에서 어른스러움을 발견했다. 허무주의와 쾌락주의로 분류되는 장면들을 이상적인 현대인의 모습에 내재한 허무감이 드러나는 장치로 해석하면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작품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활동정보
활동 일시: 2026.09.30.수 16:30
활동 장소: 경북대학교 도서관 스터디룸
참석자 이름: 구태희, 김하연, 이수영, 이정현, 정예은(발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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