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 융합이 아니라 통합, 정보가 아니라 지식
발표는 익숙한 진단을 뒤집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인문학이 위기라는 말과 함께 제기되는 처방들 — 무용론, 실용 학문으로의 전환, 공학이나 IT와의 융합 — 이 사실은 하나의 전제를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인문학은 실용적으로 도움이 안 되니 도움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전제 말입니다.
그래서 ‘통합’이라는 말이 ‘융합’이나 ‘융복합’과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히 하는 데 많은 지면이 할애되었습니다. 학문의 경계를 허물려 한다는 점에서는 겹치지만, 지금 한국에서 통용되는 융합은 실용성 혹은 자본과의 관련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학제적 연구와도 구분되었습니다. 다학제 연구에는 분과학문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문제의식은 있으나, 급변하는 문명 상황에서 인문학을 어떻게 재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없기에 실용성 담론에 다시 포획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반면 통합인문학은 인문학이 연구 주체와 대상에, 우리가 사는 세계와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실용성 담론에 포획되지 않으며, 역설적으로 실용성을 뛰어넘는 지점에서 실용성과 연결됩니다.
주목할 점은 이 주장이 분과학문의 폐지론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재의 분과학문 체제를 전복하고 통합인문학 체제를 전면적으로 구축하는 일은 현실적이지 않으며, 체제를 조금 완화해 통합인문학이 존립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편이 긴요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융복합을 빌미로 학과를 통폐합하는 일에 대해서는 분명한 경계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학문의 탄생이 아니라 학문 자체의 소멸이며, 이런 경우 역설적으로 분과학문을 지켜내는 것이 학문을 지켜내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논의의 핵심은 디지털 문명이 ‘앎’의 성격을 바꾸고 있다는 분석에 놓였습니다. 지식이 모두 정보로 바뀌면서 지식의 생산과 유통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정보화된 지식은 고전적 의미의 지식과 성격이 다릅니다. 고전적 의미의 지식은 정보로서만 존재하지 않고 내 삶의 지표로서, 삶이 나아갈 방향을 비추는 밤하늘의 별빛처럼 존재합니다. 양명학이 지행일치를 말할 때의 ‘지(知)’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반면 정보에는 삶과의 통일적 연관이 요청되지 않으며, 본질적으로 기능적이고 파편적이어도 무방합니다.
예로 든 것이 『금오신화』였습니다. 작품을 온전히 읽었을 때 우리는 작가에 대한 앎, 남녀의 사랑에 대한 앎, 그리고 폭력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면서도 결코 굴하지는 않는 인간의 삶에 대한 앎을 얻게 됩니다. 인터넷에서 작가와 줄거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지만, 아무리 충실한 정보라 해도 시간과 힘을 들여 작품을 다 읽었을 때 오는 깨달음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정보는 아무리 많이 습득해도 인격의 향상이 일어나는 법이 좀처럼 없다는 것입니다.
통합인문학의 본령은 대상의 ‘이해’에 있다는 명제가 여기서 나옵니다. 하나의 텍스트를 어학은 언어적 관점에서, 문학은 문학적 관점에서, 역사학은 역사적 관점에서 각각 다르게 이해하는 지금의 방식은 온당한 이해라 하기 어렵습니다. 텍스트는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 곧 전일체(全一體)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서 ‘통합’이 네 겹의 의미를 지닌다는 정리가 제시되었습니다. 분과의 통합, 주체와 객체의 통합, 이성과 감성의 통합, 그리고 이해와 비판의 통합입니다.
특히 공을 들인 것은 비판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이해가 없는 비판은 맹목적이며, 비판이 없는 이해는 추상적이라는 것. 비판은 그 자체가 목적이거나 단순한 부정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본래면목을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으며, 그래서 방법적인 것입니다. 비판의 주체에게는 냉철함과 겸손함이 함께 요구됩니다. 냉철함은 높은 심급의 이성에서, 겸손함은 주체의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홍대용이 소환되었습니다. 학자는 뽐내는 마음(矜心), 남을 이기려는 마음(勝心), 이익을 꾀하는 마음(利心), 권력에 빌붙으려는 마음(權心)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경계입니다.
비판의 자유에 대한 옹호가 뒤따랐습니다. 주희의 경전 해석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문난적으로 몰린 윤휴의 사례, 그리고 주자학만이 진리로 통용되던 시기에 사상의 자유와 비판의 자유를 위해 분투한 홍대용. 한국 역사에서 학문적 비판의 자유가 그럭저럭 확보된 것은 이제 겨우 2, 30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진단이 이어졌습니다.
발표의 가장 독창적인 대목은 인문학적 진리를 세 층위로 나눈 부분이었습니다. 첫째는 사실 관계로서의 진리로, 옳고 그름이 정해져 있습니다. 둘째는 구성된 진리로, 보는 입장에 따라 달라집니다. 셋째는 존재관련으로서의 진리입니다. 나와 타자가 각각 서로를 열고 서로를 영접할 때 이룩되는 관계 속에 있는 진리이며, 해명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만큼 나는 존재하게 된다는 점에서 ‘실존적 진리’라 부를 만합니다.
사례가 아름다웠습니다. 18세기 문인화가 이인상이 새집을 지으며 토지신에게 올린 글. 집터를 닦느라 토맥을 상하게 하고 헌 집을 부순 잘못을 고하며, 앞으로 우직함을 지키고 소박한 음식을 먹으며 도를 지키겠노라 다짐하는 글입니다. 이 글을 읽는 우리는 염치와 개결함과 삼감이라는 태도를 하나의 진리로 경험하게 됩니다. 이덕무가 박지원의 산문에 평을 붙인 『종북소선』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되었습니다. 두 정신이 마주해 깊은 사유를 나누는 그 행위는 본질상 우정이며, 한 존재가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다른 존재에게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결론은 분명했습니다. 통합인문학은 방법이면서 동시에 존재론이며, 결국 실천론 및 윤리학과 연결됩니다. 진리나 윤리가 학문의 ‘밖’이 아니라 ‘안’에 있을 때, 학문은 다시 세상을 맑게 하고 세상이 나아갈 길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토론 | 통합의 크기는 어디까지인가
세 편의 토론문은 공감에서 출발하되 각기 다른 방향에서 ‘통합’의 경계를 되물었습니다.
첫 번째 토론은 통합의 크기를 겨냥했습니다. 호랑이의 무늬는 밖에 있고 인간의 무늬는 안에 있다는 비유로 발표에 공감을 표한 뒤, 그러나 그 통합이 인문학의 범주 안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습니다. 논거는 인지혁명과 이야기였습니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허구 세계를 발명하고 자연선택의 굴레를 벗어나 문화적으로 진화해온 종이며, 그 문화적 진화의 돌연변이가 과학혁명이라는 것입니다. 후설이 과학의 실증주의가 유럽 정신의 위기를 낳았다고 진단하고 생활세계에 기반한 학문을 기획했듯, 발표도 그 사상적 계보에 속한다는 평가가 뒤따랐습니다. 다만 이제 문화적 진화의 자식이 인간을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공지능은 문화적 진화의 정점이면서 인간 주도 문화적 진화의 종말을 예고합니다. 그들은 지능은 높지만 내면은 없는데, 미래세대는 그들과 협력하지 않고는 사회적 동물로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윌슨이 말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 곧 구석기인과 다를 바 없는 감정으로 신의 경지에 이른 기술을 다루는 상황 앞에서, 인문학에 의한 통합이 아니라 인문학자가 과학의 프레임과 통합되는 열린 사고야말로 21세기의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두 번째 토론은 스스로를 ‘반자(反子)’의 입장이라 칭하며 자본과 실용에 대한 경계심 자체를 되물었습니다. 디지털 정보사회를 후기 혹은 말기 자본주의로 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자본주의 현상으로 볼 것인가. 학문적 글쓰기와 대중적 글쓰기는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이며,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것은 제대로 된 지식 가공업자와 소매업자라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가장 날카로운 대목은 학문의 자유와 자본의 자유를 연결한 부분이었습니다. 학자에게 필요한 사상과 출판의 자유는 자본의 자유가 보장될 때 비로소 보장되며, 출판사와 인쇄소가 국가 소유일 때 출판의 자유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연구 시간을 확보하려면 강의 시수를 줄여야 하는데 그것 역시 자본에 의존한다는 현실적인 지적도 덧붙었습니다.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에 대한 재해석도 흥미로웠습니다. 전통은 보여주기식 학문인 위인지학을 경계했지만, 오늘 인문학이 위기에 처한 한 가지 이유는 오히려 위인지학을 하지 않아 사람들이 인문학의 존재 자체를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다른 자리로 돌아갑니다. 위기지학이든 위인지학이든 넘어서서, 진정한 학문은 아무것도 위하지 않는 것, 곧 타우마제인과 호기심에서 출발한 학문이 학문 발전의 진정한 동력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토론은 ‘접(接)과 현(現)’이라는 틀을 제시했습니다. 고전적 진리와 인문적 가치에 접해 이어받는 것이 접이고, 그 가치를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적용해 실현하는 것이 현입니다. 토론자가 오랫동안 번역해온 간디와 틱낫한, 달라이 라마가 그 사례로 제시되었습니다. 간디는 힌두·불교 전통에서 진리와 비폭력이라는 가치를 찾아 인도인과 영국인 사이에,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 구현하려 했고, 틱낫한은 초기 불교의 계율을 현대화해 마음챙김 수행법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자신의 전통 안에서 인간적 가치를 확인하고 그것을 당대에 적용한 모습은 발표가 말한 통합인문학의 실천적 판본으로 읽힙니다.
이 토론이 던진 세 가지 물음이 자리를 열어두었습니다. 특정 시점에 하나의 시대정신이 아니라 복수의 시대정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개인의 인연과 실존적 주체성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는 것은 아닌가. 21세기의 통합인문학이 역사와 정치, 경제와 과학까지 포괄해야 한다면 차라리 ‘통합인간학’이라 부르는 편이 어떤가. 그리고 정도전이 불교를 비판한 「불씨잡변」을 오늘의 자리에서 편향적이라 지적할 수는 있지만, 14세기로 돌아가면 그에게는 유교가 시대정신이 아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