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문화도서관과 타우마제인이 함께한 인문철학 강연 프로그램 〈철학중림〉이 성료되었습니다. 이번 시리즈가 붙든 물음은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함께 잘 살 수 있는가. 이 오래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네 분의 강연자가 각기 다른 길에서 출발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농촌 공동체에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중세의 법 개념에서, 그리고 근대 시민의 탄생에서. 서로 멀어 보이는 네 개의 길은 뜻밖에도 비슷한 지점에서 만났습니다. 좋은 삶을 묻는 일은 결국 좋은 공동체를 묻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동아시아 사상과 고대 그리스 철학, 법철학의 언어와 현대 시민사회의 고민까지 — 네 번의 강연을 차례로 따라가 봅니다.
“나의 이웃은 어디까지인가?(전호근 경희대 교수)
첫 강연은 공동선을 위대한 사상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이념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조건이 만들어낸 발명품으로 보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무대는 춘추전국시대(B.C. 770~221)입니다. 봉건질서가 무너지고 전쟁이 일상이 된 이 시대는 역설적으로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풍부한 사상의 시대였습니다. 그 배경에는 기원전 7세기경의 농업혁명이 있었습니다. 생산력이 수백 배로 뛰면서 농민이 공동체 유지의 핵심 주체로 떠올랐고, 서로 기대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는 벼농사가 상호의존적 공동체를 요구했습니다. 노예를 뜻하던 ‘민(民)’ 자의 옛 자형이 화면에 떠오르고, 이 글자가 농민을 가리키게 되기까지의 변화가 짚어지는 대목에서 객석의 집중도가 높았습니다. 공자와 맹자의 유가란 결국 그 농민들이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생활의 규칙을 도덕률로 벼려낸 결과입니다
공자의 인(仁)을 설명하며 인용된 『논어』의 한 장면도 오래 남았습니다. 마구간에 불이 났다는 소식에 공자가 물은 것은 단 한마디, “사람이 다쳤는가(傷人乎)”였고 말에 대해서는 끝내 묻지 않았습니다. 맹자의 측은지심 역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본 사람의 반사적인 마음으로 설명되었습니다.
강연의 후반부는 이 오래된 개념을 오늘의 자리로 끌어왔습니다.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사정을 헤아리는 ‘서(恕)’는 SNS에 댓글을 달기 전 한 번 멈추는 일로, 천하위공(天下爲公)은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이물질을 헹궈내는 사소한 수고로 번역되었습니다. 귀찮다고 대충 버린 플라스틱이 결국 미세 플라스틱이 되어 내 식탁에 오른다는 대목에 이르러, 매일 지나치던 익숙한 공간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은 분명했습니다. 동아시아의 공동선 전통은 거창한 혁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옆집 사람의 얼굴을 보고, 내가 쓰는 물건의 출처를 생각하기를 권할 뿐입니다. 오래전 농민들이 그러했듯, 오늘의 우리에게도 공동선은 미덕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입니다.
“행복은 왜 공동체와 연결되는가?“(김영균 청주인문아카데미 원장)
두 번째 강연은 ‘행복’이라는 익숙한 단어를 다시 정의하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는 주관적인 만족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잘 사는 것’, ‘잘 행위하는 것’, 곧 인간으로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는 일을 뜻했습니다. 즐거움 없이 행복한 삶은 불가능하지만 즐거운 감정이 곧 행복은 아니며, 참된 행복에는 의미 있는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행복이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에 관한 문제로 옮겨가는 순간, 왜 이 물음이 정치철학으로 이어지는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났습니다.
플라톤의 『국가』가 그 첫 무대였습니다. 원제인 ‘폴리테이아(Politeia)’는 정치체제만이 아니라 폴리스 시민들의 관습과 가치, 교육 방식까지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플라톤에게 나라는 개인이 스스로 자족할 수 없기에 성립하며, 서로에 대한 ‘필요’가 그 기원입니다. 그가 나라의 성립을 설명하며 ‘자연의 이치에 따른(kata physin)’과 ‘자연에 어긋나는(para physin)’을 대비시킨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인간은 본성상 경쟁보다 협력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의 올바름은 각자가 “제 일을 하는 것”에서 성립합니다. 이는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원리가 아니라, 각자가 자신에게 적합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와 교육이 마련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생각을 이어받되 더 분명하게 밀고 나갑니다. 인간이 ‘정치적 동물’인 이유는 혼자 살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벌이나 다른 군서 동물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말(logos)을 사용해 좋음과 나쁨, 정의로움과 정의롭지 못함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인지를 함께 모색합니다. 폴리스가 존립하는 이유는 단순히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eu zēn)’에 있습니다. 여기서 공동선은 바른 정체와 잘못된 정체를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체제는 바르고, 통치자의 사적 이익만 좇는 체제는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강연은 이 주장이 마주하는 반론도 함께 다뤘습니다. 공동선이라는 명분이 특정한 삶의 형태를 강요하는 폭력으로 변질된 사례는 현대사에도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나’의 정체성을 내가 속한 공동체와 떼어놓고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좋은 삶을 묻는 일이 곧 좋은 공동체를 묻는 일이 되는 이유입니다.
“법철학으로 살펴보는 법의 목적”(이진남 강원대 교수)
세 번째 강연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속의 모순을 짚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현대인은 “법대로 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법은 최소한 정의로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이중적인 법 개념이야말로 혼란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논의는 정의(正義)의 어원에서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각자에게 제 몫을 주는 것(Suum cuique tribuere)” — 여기서 핵심은 ‘제 몫’을 뜻하는 라틴어 ius입니다. 이 말이 iustitia를 거쳐 justice가 되었고, 동시에 right, 곧 권리가 되었습니다. 정의와 권리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이후 논의 전체를 지탱하는 축이 됩니다.
정의는 여러 갈래로 나뉩니다. 응징을 통해 잘못을 바로잡는 동적인 정의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정적인 정의. 절차와 과정을 중시하는 형식적 정의와, 결과를 중시하는 실체적 정의. 강연은 이 구분이 정치적 좌우의 대립과도 겹친다는 점을 짚으면서, 어느 한쪽만으로는 정의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 크레온의 명령(실정법)과 안티고네가 따른 신의 명령(자연법)이 충돌하는 장면은, 이 긴장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되었습니다.
강연의 중심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법 정의(定義)가 놓였습니다. “법이란 공동선을 위해, 공동체를 돌보는 자가, 이성의 명령에 따라 공포한 것이다.” 이진남 교수는 이 한 문장을 네 요소로 분해했습니다. 법의 존재 이유는 공동선이고, 법의 본질은 이성의 명령이며, 법을 제정하는 것은 공동체의 책임자이고, 법이 실현되는 통로는 공포의 과정입니다. 여기서 결론이 도출됩니다. 정의롭지 않은 법은 법이 아니라 ‘법의 타락(legis corruptio)’입니다. 흔히 소크라테스의 말로 알려진 “악법도 법이다”라는 문장이 실은 후대에 만들어진 신화라는 지적도 함께 다뤄졌습니다.
마지막 물음은 법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였습니다. 통치자만을 위한 정치는 변질된 것이고, 공동의 이익을 위한 정치가 이상적인 것입니다. 앞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기준이 중세를 거쳐 그대로 이어지는 지점입니다. 강연은 네 요소를 다시 불러와 공동선이 실현되는 조건을 정리하며 닫혔습니다. 약자까지 포함하는 법, 보편타당한 원리에 따르는 법,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제정되는 법, 그리고 처벌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법을 지키는 준법정신입니다.
“시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이병준 부산대 교수)
마지막 강연은 뜻밖의 질문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인간은 왜 일을 하는가. 생계유지인가, 자아실현인가, 인간 발달과업의 완수인가, 아니면 일이 없으면 사회적으로 소외되기 때문인가. 일자리와 인간의 존엄을 나란히 놓는 이 도입은 공동선이라는 주제가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우리 삶의 구체적 조건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환기시켰습니다.
이병준 교수가 주목한 것은 루소가 남긴 오래된 구분, 곧 ‘인간’과 ‘시민’입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개인이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어딘가에 속하기를 원합니다. 자유와 공동체 소속감을 동시에 갈망하는 존재, 호모 듀플렉스(homo duplex)입니다. 강연은 이 양면성을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시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도 짚어졌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시민권에서 근대의 시민 계급으로, 그리고 하버마스가 말한 공론장 — 시민들이 언어를 통해 만들어내는 장 — 에 이르기까지, 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존재입니다. 짐멜의 ‘친교(Geselligkeit)’ 개념은 개인적 정체성과 사회적 정체성이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설명하는 자리에 놓였고,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논의는 학습이 개인의 머릿속이 아니라 상호의존적 관계망 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강연의 핵심어인 ‘I와 We의 균형’은 이 맥락에서 제시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공동선은 어떻게 도출될 수 있을까요. 강연은 두 갈래를 제시했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명제, 곧 일반의지로부터 도출되는 길과 민주적 절차와 숙의 과정을 거친 사회적 합의로부터 도출되는 길입니다. 서로 다른 가치 지향을 지닌 집단들이 한 사회 안에 공존하는 오늘의 조건에서, 공동선은 선언으로 주어질 수 없습니다.
지속가능성 논의가 이어진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현 세대의 삶의 질을 확보하는 동시에 미래세대가 자신의 삶을 조성할 선택가능성을 남겨두는 것. 양립할 수 없어 보이던 세력들이 적어도 일정 수준까지는 화합할 수 있게 만든 개념이라는 점에서, 지속가능발전은 공동선이 실제로 만들어지는 방식의 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강연은 세 단어로 정리되었습니다.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 공존(coexistence), 균형(balance). 공동선은 완성된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들이 기대어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천천히 학습되고 실현됩니다.
네 강연은 각기 다른 시대와 언어를 통과했지만, 공통적으로 하나의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공동선은 누군가 위에서 선포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춘추전국시대의 농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로에게 기대는 법을 스스로 만들어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광장에서 말을 주고받으며 무엇이 좋은 삶인지를 함께 물었습니다. 아퀴나스는 공동선을 향하지 않는 법은 법이 아니라고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시민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어딘가에 속하기를 원하는 자기 안의 두 마음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갑니다. 공동선은 결론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분리수거장에서 이물질을 헹궈내는 사소한 수고에서, 댓글을 달기 전 잠시 멈추는 순간에서, 나와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리에서 조금씩 만들어집니다. 〈철학중림〉이 남긴 것도 정답보다는 이 질문 쪽에 가까웠습니다. 나는 어디까지를 ‘우리’라고 생각하는가. 앞으로도 타우마제인은 시민들이 함께 묻고 함께 생각하는 자리를 이어가겠습니다.
- 일시: 2026년 5월 9일, 16일, 23일(토) 14:00~15:30/ 5월 28일(목) 19:00~20:30
- 장소: 손기정문화도서관 1층 라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