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aumazein 인문철학재단 타우마제인
Academy

2025 타우마제인X종로도서관 인문철학 특별강연

신홍임, 고인석, 송대현, 신중섭

1회차 | 우리는 왜 친구가 없을까? — AI 시대의 외로움 극복 (신홍임 국립순천대 교수)

첫 강연의 출발점은 역설이었습니다. 인터넷으로 타인과의 연결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지만, 개인이 경험하는 주관적 외로움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외로움은 급격한 노화와 심장질환, 수면장애 같은 결과로 이어지기에 이미 사회적 개입이 필요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인상적인 대목은 우리가 자신의 외로움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분석이었습니다. 나의 외로움은 거리의 노숙자나 독거노인의 외로움과는 다르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내가 외롭다고 인정하는 순간 스스로를 문제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황재형의 광부 그림과 박수근의 〈소녀〉가 이 대목에서 함께 걸렸습니다.

외로움이 우울과 구분되는 지점은 그 안에 관계에 대한 욕구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외로운 사람들은 좀처럼 먼저 다가가지 않습니다. 타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이미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귈 기회를 늘리거나 사회성 기술을 가르치는 개입은 효과가 미미했고,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아야 한다”는 믿음을 “모든 사람과 잘 지낼 필요는 없다”로 바꾸는 편이 효과적이었다는 연구가 소개되었습니다.

후반부는 의인화라는 주제로 옮겨갔습니다. AI에게 이름을 붙여본 적이 있는지 묻는 슬라이드로 시작해, 로봇의 표정에서 인간의 감정을 읽어내는 우리의 습성, 그리고 인간과 너무 비슷해지면 오히려 호감이 떨어지는 불쾌한 골짜기 현상까지. 의인화가 연결감을 높이고 사회적 상호작용을 촉진한다는 관점과, 로봇에게는 우리가 침해할 자기존중도 감정도 없다는 관점이 나란히 제시되었습니다.

마지막은 이백의 〈월하독작〉이었습니다. 홀로 마시며 함께할 벗이 없던 시인이 잔을 들어 달을 맞이하고 그림자를 마주해 셋이 되는 장면. 변방 출신 비주류로서 느낀 사회적 소외와 우주 앞에서의 절대적 고독을, 자연을 벗 삼아 스스로 구원한 예술적 자유의 경지로 읽어냈습니다. 결론은 단정했습니다. 외로움은 보편적인 것이니 나만 외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웃의 범위를 넓혀보자는 것입니다.

2회차 | 인간보다 더 똑똑한 기계들, 괜찮을까? (고인석, 인하대학교 철학과 교수)

두 번째 강연은 질문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기계와 인간, 어느 편이 더 똑똑한가. 그런 기계를 만들고 싶은가. 만든다면 왜 만드는가.

논의의 출발은 2016년 알파고였습니다. 다만 강연자가 파고든 것은 승패가 아니라 ‘우월함’이라는 말의 의미였습니다. 중립적으로 보자면 알파고가 한 일은 이세돌을 상대로 바둑을 둔 것이라기보다, 어느 곳에 다음 수를 두면 승리 확률이 극대화되는지 계산해 출력한 것입니다. 바둑을 수담(手談)이라 부르는 전통, 곧 사람 사이의 소통이라는 바둑의 본질에 비추면 두 일은 같지 않습니다. 인공지능 담론에는 늘 의인화의 정조가 끼어든다는 지적이 뒤따랐습니다.

이어 인간 지능을 따라잡는 일이 왜 생각보다 어려운지가 세 갈래로 검토되었습니다. 세계를 지각하는 인공지능이 가능한가. 지각은 잠재적인 행위를 전제하고 반영한다는 관점이 기계 시각의 한계와 함께 다뤄졌습니다. 개념을 아는 인공지능은 어떤가.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 중 첫 조항을 실제로 구현하려면 로봇에게 ‘인간’이라는 개념을 가르쳐야 하는데, 의미를 직접 입력하는 방식과 사례에서 배우게 하는 방식 어느 쪽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감정을 가진 인공지능은 어떤가. 감정을 가진 것과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의 차이를 두고 서얼의 중국어 방 논증이 소환되었습니다.

강연이 제시한 결론은 인지능력 공간이라는 틀이었습니다. 인간의 인지능력은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여러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차원은 계속 늘어나고 변화하므로, N차원에서 인간을 뛰어넘는 AI도 N+1번째 차원의 인간 지능을 포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연은 여기서 안심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에 못 미치는 인공지능이라고 해서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점은 제어 가능성으로 옮겨갔습니다. 우월한 존재가 열등한 존재를 제어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으며, 기술의 작동 원리에 대한 이해가 제어의 선행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인용된 한 문장이 이 논지를 압축합니다. 사람들은 컴퓨터가 너무 똑똑해져서 세상을 지배할까 걱정하지만, 실제 문제는 아직 너무 멍청한 컴퓨터가 이미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 강연은 힌튼이 2024년에 남긴 경고문을 마지막 슬라이드에 올리며 닫혔습니다.

3회차 | 우정의 정의와 종류 — 친구란 어떤 존재인가(송대현, 인천대학교 교수)

세 번째 강연은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8~9권을 직접 펴놓고 읽는 자리였습니다.

던져진 질문들은 소박하면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승승장구할 때와 곤경에 처했을 때, 어느 쪽에서 친구가 더 필요한가. 친구의 수는 몇 명이 적절한가. 열등한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우정의 조건은 세 겹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상대에게 선의를 가질 것, 상대도 나에게 선의를 가질 것, 그리고 서로가 그 선의를 알아차릴 것. 이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으로 인해’ 우정이 생기는가에 주목해 셋으로 나눕니다. 이익으로 맺어진 우정, 즐거움으로 맺어진 우정, 그리고 훌륭함으로 맺어진 우정.

강연의 핵심은 세 번째였습니다. 훌륭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을 바라며, 자신을 사유하는 부분과 동일시합니다. 그런 사람이 상대에게서 같은 특징을 발견하고 맺는 관계이기에 지속적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친구는 또 다른 나다”라는 유명한 문장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발췌문에는 뒤집어진 경우도 함께 실려 있었습니다. 못된 자들은 자기 자신을 피하며 시간을 함께 보낼 사람을 찾는데, 혼자 있을 때 역겨운 일들이 떠오르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것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대목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분열되어 있어 스스로에게조차 친애를 느끼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남과도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 1회 강연이 심리학의 언어로 말한 것을 2,300년 전의 텍스트가 다른 언어로 되풀이하는 셈입니다.

4회차 | 자유와 행복 — 다른 사람은 행복한데 나는 왜 불행한가 (신중섭,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마지막 강연은 행복이라는 가장 흔한 말을 다시 정의하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가장 완전한 덕을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며, 인간 본성에서 가장 고결한 것을 성취하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이어 세계행복보고서의 지표들이 검토되었습니다. 147개국 가운데 한국이 어느 항목에서 뒤처지는지가 구체적으로 짚였는데, “문제에 처했을 때 믿고 의지할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가”를 묻는 사회적 지지 항목과 삶을 선택할 자유 항목이 특히 낮았습니다. 행복과 밀접한 요인으로는 타인에 대한 관심과 나눔, 사회적 연결성, 공동체적 정서, 신뢰가 꼽혔고, 부정적 요인으로는 절망감과 정치적 갈등이 지목되었습니다. 앞선 세 강연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다룬 ‘연결’이 여기서 통계로 돌아온 셈입니다.

강연은 이 현실을 사회 변동으로 설명했습니다. 전통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위계에서 평등으로 옮겨오면서 공통된 삶의 문법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 하는 시대, 우리는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조선 사대부의 이상적 인생행로를 그린 〈평생도〉가 대조 자료로 제시되었습니다. 돌잔치에서 과거급제를 거쳐 회혼례에 이르는, 모두가 공유하던 삶의 각본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강연자는 철학을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가지고 내면의 힘을 키우는 일로 정의했습니다. 외부의 권위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일입니다. 마지막 슬라이드는 라인홀드 니부어의 기도문이었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힘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용기를, 그리고 그 둘을 분별할 지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