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 사과는 어떻게 가능한가 — 이언 매큐언 『속죄』 (이명호,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첫 강연은 잘못이 이미 벌어진 뒤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사과와 용서, 그리고 회복이 어떻게 가능한가.
논의는 뜻밖의 지점에서 출발했습니다. 사람이 남을 돕지 않는 이유가 반드시 도덕성의 부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하철 시간에 쫓기는 사람은 길에서 넘어진 노인을 보고도 지나칠 수 있습니다. 도덕적 행동에는 타인의 고통을 알아차릴 심리적 여유가 필요하며, 오늘날의 바쁨은 물리적 시간의 부족을 넘어 성찰할 정신적 공간의 부족을 뜻한다는 진단이었습니다. 도서관처럼 일상의 속도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장소의 역할이 여기서 언급된 것도 자연스러웠습니다.
강연의 골격은 네 단계로 정리되었습니다. 잘못의 인정, 사과, 용서, 회복. 중요한 것은 각 단계의 주체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은 가해자가 시작할 수 있지만, 용서는 피해자가 주는 선물에 가깝습니다. 선물은 받을 수는 있어도 달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미안하다고 했으니 이제 예전처럼 지내자”는 말은 사과가 아니라 관계 회복의 강요가 된다는 것입니다. 회복 역시 사건이 없었던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상처가 남아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상처만이 삶을 결정하지 않도록 하는 과정입니다.
이 구조를 비추는 거울로 이언 매큐언의 『속죄』가 놓였습니다. 열세 살 브리오니는 직접 보지 않은 사건의 범인을 로비라고 단정하고 경찰 앞에서 확정적으로 증언합니다. 질투와 상상력, 미성숙이 뒤엉킨 판단이었습니다. 강연이 짚은 책임의 핵심은 어린아이가 오해했다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이 확실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로 확정했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느꼈다”와 “실제로 그 사람이 했다”는 전혀 다른 문장인데, 브리오니는 이 둘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일흔일곱의 소설가가 된 브리오니는 평생 그 사건을 기록합니다. 다만 초기의 글쓰기는 세련된 기교 뒤에 책임을 숨긴 회피였고, 마지막 소설에 이르러서야 이름과 장소와 정황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소설 속에서나마 사랑을 선물합니다. 그것은 용서받기 위한 거래가 아니라, 자신이 빼앗은 삶에 줄 수 있는 유일한 문학적 선물이었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피해자에게 사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계속 책임지려는 태도. 강연이 말한 “시도가 전부”라는 문장의 의미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일시 : 2025년 3월 29일 토요일 오후 2시
장소 : 손기정문화도서관 1층 라운지
2강 | 나를 다루는 기술 — 철학을 삶에 적용하기 (박은미, 철학 커뮤니케이터)
두 번째 강연은 철학을 대학 안의 학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루는 지혜로 되돌려놓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목수가 나무를 다루듯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다룬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어 거울이 필요하듯 자기 생각의 문제도 스스로는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첫 축은 감정이었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과 폭발시키는 것은 다르며, 배려가 무조건 참는 것도 아닙니다. “너는 왜 항상 그렇게 말해?”보다 “아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무시당한 느낌이 들었어”라고 말하면 공격이 아니라 소통에 가까워진다는 구체적인 예가 제시되었습니다.
두 번째 축은 비판적 사고입니다. 인간은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는 심리적 편향에 따라 판단합니다. 비판적 사고란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강화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틀릴 가능성까지 함께 검토하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확증편향과 이중 논리가 다뤄졌습니다. 내가 지각하면 교통이 막힌 것이고 동료가 지각하면 원래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그 익숙한 비대칭입니다.
타인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의 행동을 우선 악의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일이 아니라 판단 전에 가능한 해석의 범위를 넓히는 일입니다. 질문의 형태도 중요합니다. “왜 그랬어?”는 추궁으로 들리지만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는 과정을 묻기에 설명을 이끌어냅니다. 다만 선의로 해석하는 것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다르며, 반복적인 피해가 확인되면 경계를 세워야 한다는 단서도 함께 달렸습니다.
후반부는 죽음과 고독, 그리고 실존으로 향했습니다. 죽음의 불안을 외면하면 고독도 회피하게 되고, 고독을 견디지 못하면 타인의 인정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우울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무엇에 시간을 쓸지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피투성과 기투, 본래적 자기와 비본래적 자기라는 개념이 이 맥락에서 설명되었습니다. 누구도 자신이 어느 나라, 어떤 가정에 태어날지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 조건이 삶 전체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론에는 분명한 단서가 붙었습니다. 자기다움은 인간다움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타인을 착취하거나 모욕하는 것은 자기다운 삶이 아니라 욕망에 끌려가는 삶이라는 것. 철학적 삶이란 완벽하게 이성적인 삶이 아니라 자신의 편향과 감정을 알아차리고 계속 교정해 가는 삶이라는 말로 강연이 닫혔습니다.
일시 : 2025년 5월 31일 토요일 오후 2시
장소 : 손기정문화도서관 1층 라운지
3강 | 인공지능을 어떤 사회에서 쓸 것인가 (문종만, 성균관대 하이브리드미래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세 번째 강연은 AI를 개별 기술이 아니라 역사와 사회 변동의 맥락에서 읽었습니다.
출발점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였습니다. 기존 경제 방식이 더 이상 충분한 성장을 만들어내지 못하자 세계가 기술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주목했고, 그 흐름이 디지털 전환과 4차 산업혁명 담론, 그리고 AI 붐으로 이어졌다는 진단입니다.
작동 원리에 대한 설명은 차분했습니다. 왓슨은 질문의 의미를 인간처럼 이해하지 않고 개념 사이의 통계적 연관성을 계산할 뿐이며, 알파고는 “이 수를 두면 상대가 어떤 심리로 흔들릴까”를 이해하지 않고 각 수의 승률을 계산합니다. AI의 기본 구조는 환경을 지각하고, 계산하고, 행동한 뒤 그 결과를 다시 반영하는 피드백 시스템이며, 핵심은 확률과 통계와 계산입니다.
한계도 구체적으로 다뤄졌습니다. 인간에게 쉬운 일이 컴퓨터에는 어렵다는 모라벡의 역설, 환경이 복잡해질수록 경우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조합적 폭발. 인간은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를 자연스럽게 무시하지만 자율주행차는 그것이 장애물인지 판단하기 위해 멈출 수 있습니다. AI의 역사가 세 번의 붐과 두 번의 겨울을 반복해온 과정, 그리고 알고리즘 중심에서 데이터 중심으로의 전환이 이어서 정리되었습니다.
위험은 세 갈래로 제시되었습니다. 대규모 피해를 일으킬 수 있는 재난 위험, 기술 접근성에 따라 벌어지는 불평등, 그리고 기술이 인간의 삶의 기준 자체를 바꾸는 문제입니다. 특히 AI가 인간보다 빠르게 정보를 분석할 때 인간이 의사결정 자체를 AI에 넘기는 ‘선택권의 외주화’가 지적되었습니다. 대규모 AI가 요구하는 막대한 전력과 기후위기의 충돌도 함께 언급되었습니다.
강연이 제시한 대안은 뜻밖에 구체적이었습니다. AI와 3D 프린터가 결합한 팹랩 구조, 곧 설계와 지식은 세계적으로 공유하되 생산은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모델입니다. 의료용 보조도구가 필요한 사람이 공유된 설계 파일을 자신의 몸에 맞게 수정해 지역에서 제작하고, 개선된 설계를 다시 공유하는 방식입니다. 일본의 ‘반도체 민주화’ 구상도 같은 맥락에서 소개되었습니다. 범용 칩의 대량생산 대신 의료 영상이나 천문학 신호 처리처럼 분야별 목적에 맞는 전용칩을, 학계와 기업과 지역사회가 함께 짧은 주기로 개발하는 구조입니다.
결론은 한 문장으로 요약되었습니다. AI의 미래는 기술이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가보다, 인간이 어떤 가치와 사회 구조를 위해 AI를 사용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는 것.
일시 : 2025년 7월 24일 목요일 오후 7시
장소 : 손기정문화도서관 1층 라운지
4강 | 한류는 왜 세계적인가 (이창후, 성균관대학교 교수)
네 번째 강연은 한국인에게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보이지 않는 현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태풍의 눈 안에 있으면 태풍의 위력을 체감하기 어렵다는 비유였습니다. 김밥과 컵라면은 한국인에게 평범하지만 외국인에게는 한국을 상징하는 문화라는 것입니다. 세계화는 자국 문화를 지우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문화의 특징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과정일 수 있다는 관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케이팝의 정의는 명료했습니다. 노래와 춤이 일체화된 대중예술. 서구 팝에서 춤이 대체로 부가적 요소인 데 비해, 케이팝은 공연 내내 고강도 안무와 노래가 함께 진행됩니다. 그 차이가 팬 문화의 차이로 이어집니다. 여러 도시에서 열리는 랜덤 댄스 플레이가 그 사례입니다. 음악이 무작위로 재생되면 그 곡의 안무를 아는 팬이 즉시 나와 춤을 춥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케이팝의 안무가 배경 동작이 아니라 노래의 일부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팬이 관객에 머물지 않고 직접 공연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확산 과정도 시간순으로 정리되었습니다. 2010년 전후 유럽에서 형성된 초기 팬덤, 2012년 유튜브를 통한 「강남스타일」의 폭발, 2013년 BTS의 데뷔와 2017년 빌보드 진출. 방송사가 유통을 통제하던 시대와 달리 누구나 세계 시청자에게 직접 보여줄 수 있게 된 환경이 음악과 영상과 춤을 동시에 전달하는 케이팝에 특히 잘 맞았다는 분석입니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한류를 역사적 조건에서 설명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한류가 케이팝으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1970년대 태권도 보급, 2000년대 드라마, 2010년대 이후 영화로 이어진 누적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그 밑바탕에 장기간의 사회적 안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불안하면 사람들은 문화를 발전시키기보다 생존과 방어에 집중하게 되며, 일정한 안정이 있어야 생활양식과 미적 감각이 세밀하게 축적됩니다. 여러 반찬이 나오는 백반 한 상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듯 말입니다.
결론은 네 요소의 결합이었습니다. 역사적 문화 축적, 경제 발전과 제작 인프라, 민주화에 따른 창작의 자유, 그리고 디지털 유통. 넷플릭스와 유튜브는 창구일 뿐이며 세계적 성공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콘텐츠 자체의 완성도라는 것, 그래서 한류의 지속 가능성도 인기나 자본이 아니라 잘 만들어진 콘텐츠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일시 : 2025년 9월 24일 수요일 오후 7시
장소 : 손기정문화도서관 1층 라운지
5강 | 의학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 제국주의와 의료의 역사 (정세권, 경희대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 연구교수)
마지막 강연은 의학을 질병 극복의 서사가 아니라 권력관계 속에서 다시 읽었습니다. 의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학이 누구에게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묻는 관점입니다.
첫 사례는 말라리아와 키니네였습니다. 19세기 후반 유럽이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가려 할 때 가장 큰 장애물은 열대 질병이었고, 서아프리카는 ‘백인의 무덤’으로 불렸습니다. 남아메리카 키나나무에서 추출한 키니네가 이 문제를 풀어주며 유럽인의 진출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그 혜택은 평등하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현지 주민에게는 충분히 제공되지 않았고, 오히려 식민지 건설로 철도와 도로가 놓이고 인구 이동이 늘면서 질병은 더 넓게 퍼졌습니다. 같은 의학 기술이 한 집단에는 보호 수단이, 다른 집단에는 지배와 확산의 배경이 된 셈입니다.
두 번째는 연구윤리의 문제였습니다. 미국 지배하의 필리핀 마닐라 교도소에서 진행된 콜레라 백신 실험에서 참여한 죄수 24명 중 13명이 사망했습니다. 백신이 오염된 상태였고, 참여자들은 실험의 목적도 위험성도 설명받지 못했습니다. 연구자는 대상자가 아니라 식민 행정 당국의 허가만 받았을 뿐입니다. 조사는 부주의를 지적했지만 책임을 묻지는 않았고, 책임자는 이후에도 학문적 경력을 이어갔습니다. 강연은 이 사건을 2차 대전 이후 제정된 뉘른베르크 강령의 첫 번째 원칙, 곧 참여자의 자발적 동의와 나란히 놓았습니다.
세 번째는 방역과 국제정치였습니다. 1910년 만주에서 페스트가 유행했을 때, 러시아와 일본은 자국민 보호와 방역을 명분으로 영향력 확대를 꾀했고, 청나라는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끌어들였습니다. 국제 보건 협력조차 국가 간 힘의 관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기업이었습니다. 중남미 바나나 플랜테이션을 운영한 기업과 라이베리아에 고무 농장을 세운 기업이 병원과 연구시설을 운영한 사례가 소개되었습니다. 노동자를 치료하는 긍정적 기능이 있었지만 동시에 생산성과 이윤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병원을 세웠다는 사실만으로 인도주의적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으며, 그 혜택이 누구에게 돌아갔는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강연의 결론은 현재로 향했습니다. 의료는 사회와 분리된 중립적 영역이 아닙니다. 같은 의료제도라도 사회적 위치에 따라 경험과 혜택이 달라지고, 약의 가격과 임상시험과 공급 우선순위는 국가 간 경제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의학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려면 치료 효과뿐 아니라 권력과 불평등, 경제적 이해관계와 연구윤리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시 : 2025년 11월 22일 토요일 오후 2시
장소 : 손기정문화도서관 1층 라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