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 우리는 어쩌다 필연적으로 혼자가 되었나
발표는 숫자에서 출발했습니다. 1인가구는 천만 가구를 넘어 전체의 40%를 상회하고, 우리가 ‘전형적’이라 여겨온 4인 이상 가구는 16% 남짓입니다. 50년 사이 열 배 이상 늘었고, 고령화의 결과만도 아닙니다. 전 연령대에서 함께 늘고 있습니다. 가장 작은 가구 유형에 맞춰 사회 시스템이 짜여 있는데 정작 가장 많은 가구 유형이 소수자 취급을 받는 상황입니다. 이어서 1인가구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납작하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한쪽에서는 뉴스가 위험하고 고독하고 가난하다고 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예능이 화려하고 자유롭다고 말합니다. 자신도 1인가구라며 덧붙인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외로울 때도 자유로울 때도 있지만 그 형용사들로 묶이지 않는, 중간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
핵심 테제는 1인가구가 후기 산업사회의 구조적 산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주의적 성향이나 원가족의 트라우마는 예전에도 있었고 오히려 과거에 더 많았을 텐데, 그것으로는 40%라는 수치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설명은 노동의 리듬을 따라갔습니다. 자연의 시간에 따라 일하던 농업사회에는 확대가족이, 시계 시간에 맞춰 근면 성실하게 일하던 제조업 사회에는 핵가족이 대응했습니다. 그런데 후기 산업사회의 주된 생산물은 콘텐츠와 서비스이고,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근면 성실이 아니라 개성과 개인의 역량입니다. 그 결과 노동은 자기를 생산하는 일이 되고, 쉬는 시간마저 자기관리와 자기 힐링의 시간이 됩니다. 여기서 인용된 개념이 ‘그리디 워크’였습니다. 그 산업에서 일하는 사람이 탐욕스러운 것이 아니라 산업 자체가 사람들의 시간을 빨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미디어·예술 산업 종사자의 비혼율이 80%에 이르는 반면 교사는 23% 수준이라는 수치가 이 대비를 뚜렷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가장 자주 언급된 전환은 결핍의 이동이었습니다. 후기 자본주의로 오면서 경제적 결핍은 줄었지만 그 자리를 관계적 결핍이 채웠다는 것입니다. 서울시 실태조사에서 2017년 1위였던 경제적 불안감은 2022년 4위로 내려갔고, 그 자리를 아플 때 대처의 어려움과 식사 해결이 차지했습니다. 단 5년 사이의 변화입니다.
발표 제목에 걸린 명제는 세 갈래로 풀렸습니다. 첫째, 살림은 본래 관계적 행위입니다. 강연에서는 ‘가사’보다 ‘살림’이라는 말을 선호한다는 설명이 붙었습니다. 살림은 살린다는 뜻이고, 생명을 살릴 상대가 있어야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삼십 년을 살림해온 노년 여성도 가족이 떠나고 나면 스스로는 밥을 해 먹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식사는 영양학적 행위가 아니라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누는 사회적 행위이고, 돌봄은 규칙성을 담보해야 하는데 혼자서는 그 규칙성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상대가 반드시 나를 돌봐줄 필요는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저 봐주는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다릅니다. 살림을 도와주지 않더라도 옆에 누가 있으면 쓰러졌을 때 119라도 부를 수 있습니다.
둘째, 공간의 문제입니다. 1인가구의 집은 대부분 직주근접의 원룸이며 이는 소득과 거의 무관합니다. 집을 자산이 아니라 잠만 자는 ‘대기실’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좁은 집은 좁은 관계와 좁은 활동을 만들어냅니다. “집의 상태가 곧 마음의 상태”라는 흔한 말이 이 조건에서는 다소 폭력적일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습니다. 조금만 어질러져도 집 전체가 어질러지는 구조에서 그 말은 자책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시장의 문제입니다. 식자재 시장은 여전히 가족 단위로 짜여 있어 대용량으로 사면 썩혀서 버리게 되고, 1인가구용 간편식은 비싸고 건강하지도 않습니다. 강연에서 ‘싱글 페널티’라 이름 붙인 현상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스스로 하는 일은 ‘살림’이 아니라 ‘자취’라고 불립니다. 자기가 취사한다는 뜻의, 훨씬 기계적인 말입니다.
후반부가 가장 논쟁적이었습니다. 1인가구에서는 교육 수준과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식생활 안정성이 낮고 결식률이 높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부르디외의 논의대로라면 고소득층일수록 건강한 식사를 해야 하는데, 1인가구에서는 이 구도가 뒤집힙니다. 과거 무급 가사노동이 떠받치던 자리가 비었을 때 드러나는 위험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경제자본과 사회자본, 문화자본에 ‘살림 역량’을 더해 조사한 결과는 선명했습니다. 같은 경제자본 그룹 안에서도 사회·문화자본의 차이가 실질적인 삶의 질을 갈랐습니다. 상위 집단에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비전과 국제 정세를 함께 이야기하는 공동체는 있어도 지역에서 밥을 나눠 먹는 일상적 공동체는 없습니다. 가장 심각한 고립우울군에 중·고소득 전문직이 대거 포진해 있다는 연구가 인용되었습니다. 반대로 저소득층은 몸으로 익힌 생활 역량이 의외로 높았고, 목욕탕이나 등산 모임 같은 비공식 친목으로 사회자본을 유지했습니다. 특히 눈길이 머문 곳은 사회복지관이었습니다. 제도화된 공간에서 성향도 계급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 밥을 먹고, 갈등을 조정해주는 신뢰할 만한 존재가 있는 구조. 학교가 그랬듯 이런 조건이 갖춰진 사회자본이 가장 질이 높은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무 살 이후 이런 공간을 잃은 채 남은 팔십 년을 살아갑니다.
대안을 다루는 대목에서의 태도는 신중했습니다. 인터뷰 참여자들이 보내온 사진에는 빨래방에서, 카페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장면이 많았습니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떨어진 채 타인과 접촉하려는 마음, 연결되고 싶지만 크게 간섭받고 싶지는 않은 마음입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이 마음을 정확히 담고 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구체적인 제안도 나왔습니다. 국가가 공급하는 셰어하우스는 모르는 사람끼리 짝지어주는 방식이라 미달이 나기 일쑤이니 지인과 함께 들어갈 수 있는 형태여야 한다는 것, 1인가구용 주거가 ‘방’ 단위에서 끝나지 않고 거실이 있는 ‘집’ 단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 다만 친구와 함께 사는 것조차 사회자본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므로 이를 사회적 대안으로 내놓기는 어렵다는 단서가 붙었습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지역사회의 제3의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시민들이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도 소개되었습니다. 지역 플랫폼에서 주민들이 대용량 식재료를 함께 사서 나누는 소분 모임이 자생적으로 생겨났고, 이웃들이 공실을 사랑방으로 바꾸는 웹툰이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발표는 한 문장으로 닫혔습니다. 1인가구는 속성이 아니라 상태입니다. 누구든 어느 순간 그 상태에 머물 수 있으므로, 이것은 특정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토론 | 가족은 만들 수 없지만 식구는 만들 수 있다
토론의 첫 쟁점은 혼자 사는 것이 정말 문제인가였습니다. 함께 사는 괴로움을 피해 혼자 사는 자유를 선택한 것일 수도 있는데, 구조적 조건에만 초점을 맞추면 자율적 개인으로서의 존엄이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었습니다. 답은 두 갈래로 돌아왔습니다. 혼자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면 노동시장과 사회보장이 온통 가족 중심으로 짜인 지금의 사회가 문제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애초에 혼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책상도 이 조명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닌데, 사회가 고도화되면서 나를 떠받치는 것들이 비가시화되었을 뿐입니다. 덧붙여 지금의 자유는 순수한 자유라기보다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선택지 안에서의 선택에 가까우며, 우리가 어떤 삶을 존엄하다고 부를 때 그것은 대개 자유로운 선택보다 책임이나 헌신 쪽을 가리킨다는 지적이 이어졌습니다.
구조를 지나치게 강조해 개인의 능동성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나왔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지구의 공전에 빗댄 것이었습니다. 계절이 바뀌면 우리는 점점 두꺼운 옷을 입게 되는데, 그것이 구조의 힘입니다. 다만 그 안에서도 누구는 얇게 입고 누구는 두껍게 입습니다. 그것이 개인의 자율성입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대가족을 이루는 자유는 상당한 역량과 자본이 있어야 가능한 것일 수 있다는 단서가 달렸습니다.
질적 연구의 일반화 문제도 제기되었습니다. 소수의 참여자를 대상으로 하면서 연구자의 프레임이 먼저 보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프레임워크 분석 방법을 쓴다는 설명이 돌아왔습니다. 삼십 명쯤 인터뷰하면 패턴이 보이고, 그에 맞춰 이론적 틀을 짠 뒤 다시 인터뷰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사회과학은 진리가 아니라 관점을 제시하는 학문이며, 객관성이 아니라 서로 납득 가능한 간주관성이 그 최선이라는 관점도 함께 제시되었습니다. 질적 연구가 추구하는 것은 통계적 일반화가 아니라 분석적 일반화라는 구분도 덧붙었습니다. 참고로 ‘필연적 혼자의 시대’는 편집자가 붙인 제목이고, 원래 생각한 제목은 ‘솔로 권하는 사회’였다고 합니다.
논의는 점차 문명의 차원으로 옮겨갔습니다. 1인가구가 문명의 기본 세포가 되면 누가 그것을 재생산할 것인가, 결국 문명의 종말로 가는 것 아닌가. 이에 대한 전망은 다음 단계가 ‘탈개인화’일 것이라는 쪽이었습니다. 자본주의가 지속적인 소비 주체를 필요로 하는 이상, 개인 단위에서 더 쪼개질 수 있는 것은 ‘부캐’라는 것입니다. 가상 세계에서 한 사람이 여러 정체성을 감당하고 그 각각을 위한 소비가 따로 일어나는 삶. 다만 사회복지학자로서 이를 장밋빛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말이 분명하게 뒤따랐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응답은 ‘개인 가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받았을 때 나왔습니다. 혈연 가족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중요한 것은 가족이 아니라 ‘식구’라는 답이었습니다. 매일 함께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흘쯤 보이지 않으면 왜 안 나타나지 하고 궁금해하는 존재. 가족은 우리가 만들 수 없지만 식구는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애착의 대상도 반려동물을 넘어 식물과 물건, 나아가 AI와 로봇으로 확장되리라고 보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단서가 붙었습니다. 피지컬 AI가 물성을 갖추더라도, 사람과 사람이 닿을 때 나오는 옥시토신 같은 호르몬은 대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청중 질문에서는 시니어 공동체와 취미 공동체의 경험이 공유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사회자본도 자본인 이상 재테크처럼 일찍부터 쌓아야 복리 효과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모임이든 뜻밖의 결과를 낳는 것이 인간의 창의성이니 모임은 많을수록 좋다는 말도 덧붙었습니다. 다만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며, 멀리 있는 커뮤니티가 아니라 일상 가까운 곳에 ‘부근’을 형성하는 일에는 국가의 몫이 있다는 것으로 논의가 모였습니다.
사회자는 이제 불 꺼진 창이 아니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는 말로 자리를 닫았습니다.
- 일시: 2026년 9월 16일 16:30~18:30
- 장소: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 268-20, 2층 대강연장
- 주제 : 자기돌봄의 불가능성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