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 관계가 사물을 낳는다
이탈리아의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루프양자중력이론을 통해 세계의 근원적인 모습을 탐구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탐구가 철학적 사유와 맞물려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직관을 높이 평가하며, 그들이 제기한 문제와 아인슈타인 이후의 물리학이 찾아낸 해답 사이에 놀라울 만큼 가까운 연결이 있다고 봅니다. 고대의 자연철학이든 현대의 과학이든 결국은 플라톤이 말한 동굴, 곧 무지와 편견의 족쇄를 벗어나려는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입니다. 세계의 다양한 물체를 단일한 성분으로 이해하려 한 이 통찰이, 우주를 양자장의 단일 구성으로 보는 오늘의 관점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발표는 이 직관이 근대 과학으로 스며드는 경로도 함께 짚었습니다. 뉴턴조차 멀리 떨어진 두 물체가 아무 매개 없이 힘을 주고받는다는 생각을 부조리하게 여겼고,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 패러데이의 ‘장(field)’ 개념이었습니다. 두 물체는 직접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장이라는 매체를 통해 밀고 당깁니다.
상대성이론이 가져온 변화는 통합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시공간이라는 하나의 존재자로 합쳐지고, 일반상대성이론에 이르면 그 시공간이 곧 중력장이 됩니다. 물결치고 유동하며 휘고 비틀리는 실재하는 존재자, 로벨리의 표현으로는 “거대 연체동물”입니다. 행성이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은 신비로운 원거리 힘 때문이 아니라 그 주위 공간이 구부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로벨리가 양자이론에서 끌어내는 개념은 셋입니다. 입자성은 세계가 입자라는 실체로 이루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불연속성을 뜻합니다. 비결정성은 미시 차원에서 세계가 끊임없이 요동치며, 양자 사건이 언제 어디에 나타날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핵심은 세 번째, 관계성입니다. 발표에서 인용된 비유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가로등 아래에서 나타났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다시 다른 가로등 아래에서 나타납니다. 그 모습은 가로등이라는 다른 무언가와 상호작용할 때만 드러납니다. 입자도 마찬가지로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 충돌할 때에만 존재합니다. 양자이론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지 않고, 사물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며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는지를 기술한다는 것입니다. 사물이 있어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사물을 낳습니다.
이 관점은 공간과 시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루프양자중력이론에 따르면 공간에는 최소 크기가 있고, 그 규모에 이르면 공간과 시간은 부서져 거품이 됩니다. 작은 부피들이 그물망을 이루고 그 노드가 ‘공간의 양자 입자’가 되는데, 이 양자는 그 자체로 공간이기 때문에 그것이 놓일 장소란 따로 없습니다. 개별 양자의 위치는 오직 다른 양자들과의 관계로만 정의됩니다. 사물이 공간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란 사물들이 근접해 있는 관계의 조직일 뿐입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여서, 우리가 실제로 측정하는 것은 시간 자체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맥박이 몇 번 뛸 때 진자가 한 번 흔들리는지, 진자가 몇 번 흔들릴 때 시계 바늘이 한 번 째깍거리는지. 사물들은 오직 서로에 관해서만 변합니다.
발표의 마지막은 로벨리의 관계론이 용수(나가르주나)의 공(空) 사상과 만나는 지점을 다뤘습니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하므로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중론』의 구절처럼, 여러 인(因)과 연(緣)이 화합해야 비로소 사물이 생겨나므로 사물 자체에는 고정된 성품이 없고, 자성이 없으므로 공합니다. 로벨리 자신도 두 사유의 공명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다만 발표는 여기에 유보를 덧붙였습니다. 로벨리의 해석에는 상호작용의 산물인 사건만 있을 뿐, 그 사건을 발생시키는 대상 자체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용수의 ‘공’이 자성을 지닌 실체적 대상이 없다는 뜻이지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가능적 존재로서의 대상까지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로벨리의 관계론에는 부족함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관계만 남은 세계에서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
토론은 발표가 열어둔 물음들을 여러 방향에서 파고들었습니다.
가장 먼저 제기된 것은 철학과 과학의 관계였습니다. 로벨리는 물리학과 철학 사이의 다리 역할을 자임하면서도, 형이상학이 자연과학으로부터 배워야 하며 철학을 과학에 맞춰야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마음의 본질을 알고 싶다면 내적 성찰이야말로 최악의 탐구도구라는 발언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철학은 과학의 기초개념을 성찰하는 메타학문이므로, 과학에 종속되기보다 과학이 전제하는 조건과 개념의 엄밀성을 비판적으로 되묻는 역할이 우선한다는 반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정신현상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환원주의적 오류, 서로 다른 개념체계를 뒤섞는 범주적 오류, 그리고 의식의 질적 측면을 순수한 물리적 용어로 환원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함께 따라왔습니다.
개체의 자리를 묻는 질문도 여러 갈래로 나왔습니다. 로벨리의 실재론은 존재론적으로 공동체주의를 강력하게 지지하지만, 개체의 독립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개체의 특성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개인주의는 원초적으로 성립 불가능한가. 무엇보다 의무와 책임의 주체로서의 개인은 사라지는가. 비슷한 맥락에서, 관계만 있고 관계 맺는 ‘무엇’이 없다면 세계의 연속성과 기억은 어떻게 성립하느냐는 물음도 제기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관계의 순간마다 새롭게 발생한다면 그 사이의 인과적 연결과 역사성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발표가 남긴 유보를 두고는 양쪽 방향의 질문이 모두 나왔습니다. 한편에서는 로벨리와 공 사상의 차이를 본질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중첩된 가능태가 상호작용을 통해 현실태로 드러난다는 양자역학의 설명은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상응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정반대의 의심이 제기되었습니다. 로벨리의 논의는 여전히 물리적 상호작용이라는 경험적 실재를 전제하고 있으니, 그의 ‘공’은 서구 과학이 자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관계’라는 새로운 실체를 들여온 것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물음입니다.
논의는 물리학 바깥으로도 뻗었습니다. 행정학 쪽에서는 현대 사회과학이 ‘구조’와 ‘행위주체’라는 이분법에 갇혀 선형적 인과성을 전제해왔으며, 20세기 후반부터 등장한 적응적 거버넌스나 자기조직화 모형 같은 관계적 접근의 지적 뿌리가 양자론에 닿아 있음을 확인했다는 응답이 나왔습니다. 다만 한국은 국가가 문제를 정의하고 원인을 골라 제거해온 선형적 사고방식의 전형이어서 이 패러다임을 적용하기 가장 어려운 나라일 것이라는 진단과 함께, 기후 온난화나 인구감소처럼 원인이 복잡하게 얽힌 ‘난해한 문제’부터 시작해보자는 제안이 덧붙었습니다.
이 밖에도 시공간의 양자화를 칸토어의 무한 집합론과 연결해 읽을 수 있는지, 하이데거가 말한 시간적 존재로서의 현존재와 물리학의 시간관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로벨리의 저서들이 한국에서 널리 읽히는 현상과 번역 제목들이 그의 주장을 얼마나 정확히 담고 있는지에 이르기까지 질문의 범위가 넓었습니다. 관계론이라는 하나의 주제가 물리학과 불교철학, 행정학과 과학철학을 동시에 불러 모은 자리였습니다.
- 일시: 2025년 10월 22일 17:00~19:00
- 장소: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 268-20, 6층 더 갤러리
- 주제 : 카를로 로벨리의 관계론적 자연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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